1950년대 무렵만 해도 소갈비를 식용으로 일컬을 때는 '가리'라고 했다.그래서 예전에
서울에서는 구운 갈비를 '가리구이'라고 했고 갈비탕을 '가리국',갈비찜을 '가리찜'이라 했다.
소의 갈비 한쪽 전부를 짝이라 했는데,고깃집에서는 이 가리를 짝으로만 판매하여
명절 때와 잔치 때가 아니고는가리맛을 볼 수가 없었다.예전엔 동네에서 돈을 추렴해 소를 잡아 나누어 가져가기도 했다.
일본인 가와이 아사오가 쓴 '대구물어(大邱物語)'나 마산의 언론인이었던 김형윤 선생의 유고집 '마산야화(馬山野話)'에 보면
1911년만 해도 일정한 도살장이 없고 노상이나 빈터에서 소를 도살해 오다 1930년대부터 도살장을 두고 이곳에서
소를 도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이렇게 예전에는 동네에서 추렴하거나 아니면 대갓집에서 잔치 때 쓰기 위해 소를 도살해
가리구이를 해 먹었다.요릿집에서 너비아니같은 불고기는 맛볼 수 있을지언정 가리구이는 대중음식점에서는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광주 송정리에서 최초로 짝 가리를 짧게 토막내 한 대씩 팔기 시작했고,서울에서 해방전인
1939년 낙원동에 문을 연 '평양냉면집'에서 가리구이를 '갈비구이'라는 이름으로 팔기 시작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냉면값은 보통이 20전,특냉면이 30전인데 비해 갈비 한 대는 20전으로 극장 카페 바 등이 문을 닫고 요릿집
역시 영업을 끝낸 뒤인 자정 무렵에는 술손님들이 술 깨는데 좋다 하여 기생들을 데리고 이 집을 찾아 들어
냉면 보통 한 그릇과 '갈비' 두 대를 시켰다고 한다.이렇게 먹으면 당시의 값으로 1인당 60전이 드는 셈이니
꽤 비싼 음식이어서 돈푼깨나 있는 서울의 한량들이 자주 드나들며 거드름을 피웠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불고기인 '야키니쿠'의 역사.1946년 고향인 평양을 등지고 38선을 넘어 인천과 서울,부산을 거쳐
일본에 밀항한 뒤 오사카의 센니치마에 앞에서 '평양냉면집'을 하던 '쇼쿠도엔(食道園)'의
창업주 임광식(후에 에자키 미즈오란 일본명으로 창씨개명)씨가 냉면과 함께 '야키니쿠(불고기)'를 팔기 시작하면서 일본에서도 지금은
오히려 냉면보다 '야키니쿠'가 유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의 갈비구이나 일본의 불고기는 모두 별도의 전문 요릿집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냉면 집에서
숯불에 구워 팔기 시작하면서 대중화된 것이다.그러면 옛날에는 어떻게 갈비를 이용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을까?
궁중이나 반가(班家)에서 가리찜이나 가리탕을 해먹기도 했지만 구이 종류로는 '설상(雪上)가리구이'가 있었다.
이 설상가리구이는 숯불 위 석쇠에 가리를 올려 놓고 굽다가 눈 속에 집어 넣어 빠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가리를 얼어 붙게 한 뒤 다시 언 가리를 석쇠 위에 굽는 것을 되풀이하던 것으로 양념맛이 속까지 골고루 배어 들어 맛을 더하던,
옛 선비들의 풍류와 운치가 있는 음식이었다. 김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