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2002년 6월29일 연평도 근해에서 북한 해군과 교전 중 중상을 입고 국군 수도 병원에 입원한 해군 Chamsuri 357호 위생병 故 박동혁 병장의 치료를 맡았던 이봉기 군의관의 수기 입니다. 3개월 가까이 박 병장을 치료하면서 젊은 병사를 살려내려고 무진 애를 썼던 군의관의 진한 휴머니티가 뭍어 있는 이 수기를 6?29 서해교전 4주기를 맞아 다시 게재 합니다. <편집자>
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 2002년 6월 29일 토요일. 나는 터키와의 월드컵 3, 4위전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 끝물의 애틋함이 괜히 섭섭해서 이런저런 월드컵 이야기를 동료들과 노닥거리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웬걸, 갑자기 구내방송이 나오고 어수선한 분위기…. 이윽고, TV에서는 연평도 앞바다에서 양측 해군 간에 교전이 있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국군 수도 병원 전 군의관을 비롯한 장병들은 퇴근을 미루고 대기 상태로 남겨졌고,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보낸 후 헬기를 통해서 환자들을 후송 중이라는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필요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퇴근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날, 외과계 군의관들은 입대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는 수고를 했음은 물론이다. 내과 군의관들을 찾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귀가한 나를 아내와 뱃속의 아기가 반겼다. 점심 식사를 하며 흘깃거리던 TV화면에는 사망자를 비롯해서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만삭인 아내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던 나는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어쩐지 쉽게 퇴근할 수 있었던 것이 찜찜하더라니…. ‘내과를 찾을 일이 뭘까?’ 이유인즉슨, 경상자 중에서도 배의 화재로 인한 연기로 폐 손상을 입은 환자들이 있어서 내과 군의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출근한 뒤 들어선 중환자실의 분주함은 수도병원 근무 후 처음 접하는 광경이었다. 응급수술을 마치고 누워있는 중상자들이 즐비했고 팔다리를 잃은 장병들도 눈에 띈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이게 웬 난리인가. 저 창창한 청춘들을 어찌 하라고…. 화재에 의한 흡인 손상이 의심되는 환자들을 봐주고 담당 배정을 한 후 내 환자인 오 중사의 몸에 박혀 미처 제거되지 않은 파편과 총알 조각들을 손닿는 대로 마저 빼냈다. 14mm 기관총 탄두가 깨진 채로 등 뒤를 뚫고 들어가 방광을 찢고 사타구니 근처의 피부 밑에 묻혀 있었다. 피부를 절개하고 탄두를 끄집어내니 반 동강이 난 것이 어딘가에 부딪힌 후 튀어 들어간 듯 했다. 그나마 경상 축에 속하던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사뭇 처절했다. 북방 한계선(NLL)을 넘어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는 북쪽 배를 가로막고자 Chamsuri 357호는 배의 옆구리로 적선의 진로를 막는 ‘차단 기동’을 하고 있었다 한다. 차단 기동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서로 간에 배의 옆구리를 고스란히 노출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피차간에 절대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으니…. 남하하던 북측 배가 방향을 틀며 옆으로 도는 순간 우리 장병들의 눈에는 포탑을 돌려 조준하고 있는 인민군들이 보였다. ‘어, 쟤네들 왜 저래?’ 하는 순간, 적의 85mm포가 불을 뿜었고 무척이나 가까이 붙어 있던 우리 배의 함교(조타실)가 명중 당했다. 이후 우리의 포탑들이 차례로 가격 당했다. 이때 함교와 포탑에 위치하던 장병들이 전사했다. 우리와 같은 전자 조준 장비도 없이, 수동으로 조준하는 북쪽 함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우리를 노리고 미리 공격 계획을 가진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중앙 통제실인 함교가 무력화되고 대응 사격할 수 있는 포탑들이 날아간 상황에서 어려운 전투를 벌이게 됐고, 유명한 이야기지만 권모 상병 같은 경우는 왼손이 날아간 상태에서 오른손만으로 M60 기관총을 발사하는 투혼을 보였던 눈물 나는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더욱 황당한 것은 피격당한 Chamsuri 357호가 당하고 있는 동안 급히 접근한 Chamsuri 358호에서 북측 경비정에 포탄을 퍼부어댔지만 그 상황에서도 북측 경비정은 오로지 357호만 공격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더 위협적인 상대를 먼저 공격해야하는 것이거늘, 침몰시키겠다고 작정을 했던 모양인지 ‘난 한 놈만 때려’식의 공격에 의해 357호는 결국 가라앉아 버린다. 당연히 북측 경비정은 옆에 있던 358호에 의해 신나게 두들겨 맞아서, 침몰되는 것만 겨우 면하고 퇴각하게 됐고 이후 들리는 이야기로는 북측 사망자만 30명 이상이라 한다. 같은 민족끼리 내가 더 많이 죽였네, 겨루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오전을 보낸 가운데 오 중사의 맞은 편 침상에서 생존자중 가장 많이 다친 박동혁 상병을 접하게 된다. 건장하고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의식은 없었고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었으며, 내가 군대온 이래로 목격한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들을 달고 있는 환자였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과 척추에 박혀있었으며,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익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도 길쭉한 파편이 박히고, 전신에 총상과 파편창이 즐비했다. “쟤는…, 왜 저렇게 다쳤어요?” 옆 침상에 누워 있던 부정장 이 중위가 입을 열었다. 그는 포탄에 맞아 왼쪽 발목이 부서져 절단술을 끝낸 상태였고 그 옆에는 한참을 울었는지 눈이 발그레 부어오른 젊은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약혼자란다. “우리배의 의무병 녀석인데 부상자들 처치한다고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다가 그랬습니다….” Chamsuri 357호의 의무병이었던 박 상병은 첫 포탄에 조타실이 깨지면서 파편에 쓰러진 정장 윤영하 대위를 몸으로 덮고 함교 계단 아래로 끌고 내려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방탄조끼 밑으로 줄줄 흐르는 핏물을 보며 소용없음을 깨닫고는 다시 나가 쓰러지는 전우들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숨기지 않고 뛰어다녔다. 당연히, 총을 쏘는 전투병은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로 사격을 하게 마련이지만, 부상병을 찾아 이동해야 하는 의무병은 전투 시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총탄에는 눈이 없다. 이야기를 듣자 울컥했다. 멋진 놈…. 그런데, 이게 뭐냐.
정형외과와 외과 군의관들이 달려들어 가능한 대로 파편과 총탄을 제거하고, 장루를 복벽으로 뽑고, 부서진 오른쪽 허벅지의 혈관을 이어놓은 상태였다. 엄청난 외상으로 인한 전신성 염증반응 증후군(SIRS)으로 인해 혈압이 쉽사리 오르지 않아 결국, 순환기 내과 전공인 나도 박 상병과 인연을 맺게 된다. 스완갠쯔 도자를 삽입하고 수액과 승압제로 혈압을 힘겹게 유지해 나가는 가운데, 후송 시부터의 쇽에 의한 급성 신부전 때문에 신장 내과 동료도 힘을 합해 혈액투석을 지속했고, 외상성 ARDS가 속발해 호흡기 내과 동료도 합류한다. 방광 손상이 발견돼 비뇨기과 동료도 합세하고, 부비동에 문제가 생겨 이비인후과 군의관도 손을 더했다. 건장했던 박 상병은 다행히도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고, 그 가운데, 나는 테니스 친구, 술친구들에 다름 아니었던 동료 군의관들이 실은 대단한 의사들이었음에 새삼스러워했다.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 박 상병의 숭고했던 행동을 여러모로 전해들은 우리 군의관들은 암묵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이기심으로 질펀한 세월을 뚫고 오면서 형편없이 메말라 버린 내 선량함에 박 상병의 회생은 한통의 생수가 되어 줄 것만 같았다.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것…. 레지던트 기간 동안 수없이 지새워냈던 하얀 밤들과 바꿔낸 중환자 관리의 기술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하지만, 감염부위에서 녹농균과 메치실린 내성 포도상 구균이 배양되면서 소위 항생제의 마지막 보루라 일컬어지는 이미페넴, 반코마이신, 아미카신으로 배수진을 치게 됐다. 오르내리는 체온에 일희일비하는 가운데 전신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지만 오른쪽 다리가 서서히 차가와지며 색이 죽기 시작했다. 부서졌던 혈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결국, 고관절 부위에서 절단이 이뤄졌고, 사타구니 아래쪽 오른다리는 그렇게 사라졌다. 사지 손실이 감정적 아쉬움에 그치는 사건은 아님을 누구나가 알고 있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아픈 마음과 괜스런 죄책감을 그나마 생명이 지속된다는 사실로 슬그머니 달래 버렸다. 그렇게, 3주를 지내며 더 이상의 발열도 없었고 등과 옆구리 화상부위 및 관통 창에는 발간 육아조직이 자라고 있었다. 수술부위의 상처들도 자리가 잡혔다. 인공 호흡기도 멈췄고, 기도절개를 미루며 버텨오던 기도관도 제거했다. 박 상병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사이 바싹 말라버린 박 상병은 정신을 차리면서 오히려 군의관들을 힘들게 했다. 현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차오르는 불안과 공포와 절망감을 입으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 사이에서 부서진 육체로 꼼짝 못하고 누워 흐느끼는 젊은 장정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도 불편했다. 정신과 군의관이 나서서 도움을 주었지만, 그 역시 박 상병의 망가진 육체와 앞으로 닥치게 될 고난을 대신해 줄 수 없음은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박 상병은 그렇게 회복돼 갔다. 그사이 오 중사는 방광 수술을 위해 비뇨기과로 옮겨지고, 부정장 이 중위도 정형외과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박 상병이 서해교전 환자들 중 가장 늦게 중환자실을 빠져나와 외과 병동으로 옮겨지게 됐다. 가장 위중했던 그의 회복으로 서해교전으로 인한 전투 시의 사망자 외 추가 사망자는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이에 고무된 병원 측은 수고한 군의관들에게 포상으로 위로 휴가를 주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사건에서 파생된 개인적 호사여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라며 자위를 했다. 따지자면, 6.25 동란, 경술국치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얻어진 휴가로 나는 아내의 출산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딸의 첫 모습을 대한 순간만큼은 광막한 우주 속에 나와 아이, 단 둘만 존재하는 감격이었다. 그 때까지 내 삶이 순전히 그 순간을 위한 것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서도, 배냇짓을 하는 딸아이에게 풍덩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리는 사이에 또 한달 정도가 흘렀다. 어느 날, 박 상병이 다시 중환자실로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식이 나빠져 CT를 찍어보니 뇌 실질 전반에 걸친 세균 감염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예의 배수진용 항생제들은 계속 사용되던 중이었고, 중환자실에서 다시 만난 박 상병은 완연히 수척해진 모습으로 인공호흡기와 약병들에 또다시 생명을 매달고 있었다. 새로 개발된 항생제들을 민간에서 구매해서 사용하기도 해봤지만 패혈성 쇼크가 이어지며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결국 9월 20일 금요일 새벽에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 이틀 뒤, 가족들의 오열 속에 우리 병원에서 영결식이 거행되고 박 병장(진급했다)은 대전 국립묘지에 묻혔다. 충무 무공 훈장도 수여됐다. 하지만 그는 꿈꿔왔을 나머지 인생을 하늘로 가져가야 했고, 그의 부모님은 아들을 잃었다. 그를 만났던 군의관들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 옴짝달싹 못하는 역사의 틀 속에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고, 인류사에 전쟁이 없어지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한 선량한 젊은이의 아까운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일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안겨줬다. 나도, 내 주위의 사람들도 남이 일으키는 전쟁에 인생을 맡겨야 할 수도 있는 초라한 존재일 뿐이었다. 군의관 생활을 하면서 바라본 전쟁은 더욱 두려운 모습으로 저 멀리 서있다. 아득하게 멀지만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그의 섬뜩한 실루엣을 본다. 갖가지 대의명분으로 치장해도 전쟁은 부서지는 육체와 영혼을 제물로 삼아야 한다. 전장에서 맞닥뜨려야 할 맹목적인 폭력들. 그리고 잇따르는 수많은 이의 비극들. 이를 막기 위한 소위 ‘전쟁억지력’을 키우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만들고, 더 많은 무기를 갖춰야 하는 또 다른 아이러니…. 그렇게 가을을 보내던 중 병원 앞 산책로에서 이 중위와 그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약혼녀를 만났다. 처음 중환자실에서 대하던 날의 우울했던 첫인상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밝은 모습이었다. 이 중위는 의족 보행 연습을 시작한 뒤였고, 퇴원 후 다시 해군으로 복귀해 사무직에서 복무할 예정이었다. 그들의 결혼도 예정대로 이뤄질 거란다. 삶은 계속되기에 여전히 아름답다. (konas) 이봉기(2002년 6?29서해교전 당시 국군수도병원 내과 군의관)
내 아들아!누구를 위해 목숨을 받쳤니!? 아들아 잘 지내고 있니. 오늘도 엄마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단다. 네가 너무나 아파했기에 쓰리고 저미어 오는 가슴 가눌 길이 없구나. 중환자실에서 너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고. 성한 데라고는 머리하고 왼손뿐이었어. 22개나 되는 링거 줄에 의지하고 수 많은 기계들. 3일 만에 죽었다가 심페 기능 소생 기술로 살아났다고 하더라. 한 달 되어가면서 의식을 찾은 내 아들. 왼쪽 다리 빼고 파편 때문 에 대장은 망가졌고 소장은 일곱 군데 꿰매고 배는 오픈 시켜 반창고로 붙여놨고 허리는 끊어졌고 왼쪽 척추에 큰 파편이 있고 화상으로 인해서 푹 패어 그 밑에 인공 항문. 오른쪽 다리엔 신경이 다쳤는지 감각도 없고 여기저기 파편 조각들이 상처를 내고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들어있다. 뱃속에는 파편 쪼가리가 100개가 더 있다고 하더라. 깨어나면서 찾아오는 고통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입을 벌리면 서 통증을 호소하니까, 입술이 찢어졌다. 날마다 떨어지는 저혈압. 수없이 수혈해도 혈소판은 떨어지고 생과 사가 왔다갔다한다. 교전 때 입은 충격일까. 총알이 날아오고 죽은 대장님이 달려든다네 . 환청에 시달리며 눈이 빨갛게 부어 잠 못들고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면서 힘들어 하는 아들의 모습. 내 손을 잡고 울부짖는다. 이 힘든 통증을 어이해야할지, 침상에 누워 꼼짝도 못하는 아들. 안쓰럽고 불쌍하고 처참했다. 다리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왼손으로 엉덩이쪽을 만지면서 흐느낀다. ‘엄마, 내 다리 어디로 갔어? 저리고 아프다.’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다리가 없어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너와 우리 가족은 피눈물을 토했다. 네가 왜 총 맞고 병원에 누워있어야 하냐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너는 물만 한모금 삼켜도 장출혈이 심했다. 밤이 되면 통증은 더 무섭다고 했다. 긴 밤을 꼼짝도 못하고 뜬눈 으로 지새우는 아들. 뼈에 사무치는 고통 때문에 차라리 엄마가 아프고 싶었다. 건강하고 씩씩한 아들이었다. 무능력한 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의 상처를 바라보며 사무쳐오는 슬픔을 되새길 뿐. 겨우 고개를 돌려 문쪽만 바라보는 아들. 아빠 엄마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정말 가슴이 아팠다. 불쌍하기도 하고. 이런 속에서 약간 호전되더니 점점 심해져 2002년 9월 1일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많은 상처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못했다. 엄청난 상처를 뒤로한 채 9월 20일 새벽, 저 멀리 하늘 나라로 가버렸다. 그 힘든 통증 속에서도 살아준 내 아들에게 고마웠다. 대전에 너를 묻고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엄마는 왜 이리 슬프고 초라한지 서글퍼진다. 6월 29일 국군 수도 병원으로 간 우리 가족은 가을이 되어서 피멍진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아들에 대한 보고픔, 웃음을 잃어버린 가족들, 내 젊은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전을 수없이 다니면서 아들이 한없이 보고싶다. 처음엔 전사자 여섯 가족은 서먹서먹했지만 자주 만나다보니 요새는 친하게 지낸다. 2002년은 힘들고 고통을 주는 씁씁할 한 해였다. 내 응어리진 가슴에 한을 남겼다. 무슨 약으로도 치유가 안된다. 평생 흘릴 눈물을 쏟아버렸다. 새해가 밝아오지만 아들에 대한 보고픔은 더욱 간절했다. 「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많은 상처를 안은 부모 마음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올라 청와대 민원실로 전화했다. 이런 미친 인간은 국정원 기획조정실장 내정자로 뽑으면 안된다고 항의했다. 국방부에도 항의했다.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2003년 6월 11일 기다리던 아들의 제대날이다. 대문을 열고‘나 왔어’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것만 같다. 문도 열어보고 대문 밖에 나가 서성거린다. 안절부절 못하는 어미의 심정을 누가 알까. 해가 뉘엿뉘엿 져도 아들은 오지 않는다. 북받쳐 오는 설움에 남편을 붙들고 ‘왜 동혁이는 오지 않냐?’고 미친 사람처럼 목놓아 울었다. 치가공과 나와 치공소 차려 아빠 엄마 행복하게 해준다던 아들. 씩씩하고 건강하게 반듯이 자라준 아들이다.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장학금 받아 공부한 아들이다. 6월은 힘들다. 내 아들의 흔적들을 찾아서 여기저기 다녀본다. 마음이 편치가 않는다. 여러 사람들 중에 해군이 보이면 눈이 번쩍인다. 혹시 내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동혁아, 세상에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너는 가버렸지만 엄마는 너를 너무너무, 엄마의 분신(扮身)보다도 너를 사랑했다. 반듯하게 잘 자라준 아들에 대한 연민일까. 오늘도 내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해가 저문다. 총소리, 전쟁없는 하늘 나라에서 아프지 말고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자. 이 글은 엄마가 하늘나라에 부친다. 사랑하는 내 아들에게로. 서해교전 부상자를 치료해준 수도 병원 모든 분들께, 성금을 내주신 국민 여러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서해교전 당시 중상을 입고 국군 수도 병원에서 치료받다 같은해(2002) 9월20일 숨진 고(故)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 이경진 씀
출처 :** 나만의 공간 ** 원문보기▶ 글쓴이 : 안파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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