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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소년 지원병 출신의 충격적인 史料 분석

꿈에그린 2008. 1. 22. 08:57
6·25 참전 소년 지원병 출신의 충격적인 史料 분석
 
창군의 母胎 군사영어학교 졸업한 임관자 110명 中 일본군 출신 87명, 만주군 출신 21명, 중국군 출신 2명
 
공산 침략을 저지해서 대한민국을 지킨 8명의 사단장 중 7명이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었다.
建軍과 대한민국 사수의 주역들을 親日 민족 반역자로 규탄해서 무얼 얻겠다는 말인가?
과거사 청산으로 국군의 뿌리를 부정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무너진다.


柳 亨 錫 세무사
1934년 경북 선산 출생. 건국大 졸업. 연세大 행정대학원 졸업. 감사원 부감사관, 국세청 기획관리관, 재무부 국세심판소 국세 심판관 역임. 6·25 참전 소년 지원병.

조선경비대의 창설
<1945년 8월18일 중국 山東省 위현 비행장에 불시착한 광복군 수송기. 광복군들은 광복을 맞자 급히 귀국하려다 이곳에 불시착했다.>

  제16代 국회에서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명분으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바 있다. 이 법은 그 조사대상자로 군인의 경우는 일본군 中佐(중좌·중령) 이상으로 되어 있었다. 이번 제17代 국회에 제출된 개정안은 소위 이상으로 조사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이 문제로 與野가 찬반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고, 국민의 여론도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다. 과연 일본군 소위 출신 이상자들을 조사할 필요가 있는지,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효과는 무엇인지의 판단자료로 삼기 위하여 그들의 신상과 행적을 살펴본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이했으나 일본의 총독 통치는 그대로 이어졌다. 그해 9월8일 인천항을 통하여 입국한 美 제24군단장 하지 중장이 다음날인 9일 조선총독부회의실에서 아베(阿部信行) 조선총독과 일본군 제17방면군사령관 우에쓰키(上月良夫), 진해경비부사령관 야마구치(山口儀三)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음으로써 우리나라는 비로소 軍政(군정)이 시작되었다.
 
  1945년 10월31일, 美 군정 치안책임자인 美 제24군단 헌병사령관 시크 준장은 군정장관 아널드 소장에게 『국방을 위한 준비작업이 군정이 수행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업무 중의 하나』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공감한 아널드 소장이 이를 하지 중장에게 건의함으로써 軍 창설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美 군정은 1945년 11월13일, 군정 법령 제28호를 제정 공포하여 軍조직에 관한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 내용은 군정청 안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밑에 군사국을 두며, 군사국에 육군과 해군을 두도록 한 것이다. 다음날 군정청 국방부장에 군정청 치안책임자인 시크 준장을 임명하여 국방군 창설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1946년 1월4일에는 일본군 大佐(대좌) 출신인 李應俊(이응준·일본육사 제26기)을 군정청 국방부장 고문으로 임명했다.
 
  1946년 1월14일, 국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가 「남조선국방경비대」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그해 2월7일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가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 있는 태릉의 舊일본군 지원병 훈련소(現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되었고, 같은 날 초대 사령관에 美 육군 중령 마셜이 취임했다. 2월22일에는 複數(복수) 사령관으로 한국인 元容德(원용덕) 參領(참령·소령)이 취임했다.
 
  1946년 1월15일, 태릉에서 제1연대 제1대대 A중대를 창설한 것을 비롯하여 같은 해 4월까지 각 道에 1개 연대씩 8개 연대의 각 제1대대 A중대의 창설을 마쳤다. 이로써 실질적으로는 8개 중대의 창설이지만, 명목상으로는 각 道에 1개 연대씩 8개 연대의 창설을 마친 셈이다. 그 후 1946년 8월16일, 제주도가 道로 승격됨에 따라 같은 해 11월16일 제9연대가 추가로 창설됐다.
 
  이렇게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1946년 3월20일 서울에서 열린 제1차 美蘇공동위원회 소련 대표는 『美蘇 양국이 한국의 임시정부수립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는 마당에 무슨 이유로 국방부를 설치했는가』라고 항의를 했다.
 
  이에 따라 美 군정은 1946년 5월15일 군정법령 제86호를 공포하여 「국방사령부」를 「국내경비부」로 대체하고, 육군과 해군의 명칭을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로 바꾸었다. 이렇게 하여 국방부는 「통위부」로,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조선경비대」로, 그리고 남조선국방경비대 창설과 함께 국방사령부로 소속이 바뀐 海防兵團을 「조선해안경비대」로 명칭을 공식화했다. 「국방」의 개념을 「국내치안」의 개념으로 바꾼 것이다.
 
  1948년 9월5일, 조선경비대는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편되었다. 병력규모는 약 10만 명이었다.
 
 
  美 군정의 고민: 국군을 만들 사람이 없다
 
 
 
  美 군정이 조선경비대를 창설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軍 수뇌부의 구성이었다. 당장 군대는 만들어야겠는데 사람이 없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된 후 우리나라는 정통성을 가진 軍이 없었다.
 
  광복군이 軍의 법통을 이어야 한다고 나섰지만 그 수가 미미하고 정규 군사교육을 받지 못한데다가 경험마저 부족하여, 현대화된 군대를 조직·교육하고 육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광복 후 귀국이 늦어져 기댈 만한 언덕이 되어 주지 못하였다.
 
  美 군정은 법통 시비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敵軍으로 싸운 일본군 출신이지만 親日 시비로 배제할 형편이 아니었다.
 
  李應俊 장군을 군정청 국방부장 고문으로 추대할 때, 李應俊 장군이 『終戰 때까지 일본군에 종사한 사람』임을 들어 고사하자, 美 군정 측은 『당신은 그동안 일본을 위해서 盡力(진력)했는데 新生(신생)의 당신 나라를 위해서라면 死力을 다해야 할 게 아닙니까』라는 말로 설득했다고 한다.
 
  군정청 국방부장으로 취임한 시크 준장은 한국의 국방군을 창설하기에 앞서 당면한 문제를 韓美 간 언어 소통의 장벽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5년 12월5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있는 감리교 신학교에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고, 여기에서 기초적인 군사영어와 군사지식을 가르쳐 미군 지휘관의 통역관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교장에 미군 리스 중령이 임명되었고, 한국인 元容德(원용덕·만주군 中佐 출신)이 보좌관 겸 부교장이 됐다. 정원은 60명으로 예상하고 중요 私設(사설) 군사단체와 협의하여 광복군 출신 20명, 일본군 출신 20명, 만주군 출신 20명 등 60명을 추천해 주도록 의뢰하였다.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은 일본군 출신 李應俊과 만주군 출신 元容德의 적극적인 협조로 지원을 많이 했으나, 광복군 출신은 광복군이 그 법통을 이어 장차 국군의 모체가 돼야 한다며 외면했다.
 
  군사영어학교의 入校(입교) 자격은 장교와 준사관 출신으로 하고 60명을 선발해 입교시켜 정식 개교하였다. 李應俊을 제외한 일본군 大佐 출신 원로들은 자숙하는 의미에서 입교하지 않았다.
 
  그 후 경비대가 창설되는 등 장교 수요가 늘어나자 1946년 4월30일, 폐교할 무렵에는 200명이 入校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군사영어학교로는 당장 필요한 장교 수요를 충족할 수 없다고 판단, 군사영어학교를 폐교하고, 폐교 다음날 정규의 간부양성기관인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간부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군정청 국방부장의 고문을 맡아 軍창설의 산파역을 한 李應俊은 군사영어학교가 폐교한 후인 6월12일, 서류상으로만 졸업한 것으로 추인받아 正領(정령·대령)으로 임관했다.
 
  임관자 110명의 출신을 보면 일본군 출신 87명, 만주군 출신 21명, 중국군 출신 2명(1명은 광복군 출신)이다. 일본군 출신은 일본 육사 출신 13명, 학병 출신 68명(장교), 지원병 출신 6명이다. 일본군 고급장교 출신들 대부분이 자숙하는 뜻에서 입교를 기피하였음에도 일본군 출신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특별 임관으로 軍 간부 보충
 
  군사영어학교가 폐교한 다음날인 1946년 5월1일 설치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에는 군사영어학교의 폐교로 임관하지 못한 학생 60여 명과, 같은 무렵 창설을 마친 각 道 연대에서 선발한 하사관 20여 명을 함께 입교시켜 개교했다.
 
  1946년 6월14일에는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를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하였고, 1948년 9월5일에는 조선경비사관학교가 「육군사관학교」로 됐다.
 
  육군사관학교 제1, 제2기생은 군사영어학교와 마찬가지로 외국軍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입교했다. 제3, 제7, 제8기의 특별반 임관자 중에는 광복 前 외국군의 경력자로서 귀국이 늦었거나, 자숙(일본군 고급장교 출신) 또는 법통의식(광복군 출신) 등의 이유로 외면하여 군사영어학교 또는 제1, 제2기에 입교하지 못한 사람들이 정부수립과 함께 국군으로 개편된 것을 계기로 대거 입교하기에 이르렀다.
 
 
  국군의 중추가 된 일본군 장교 출신들
 
 
 
  광복 후 8개 사단 10만 명 규모의 국군을 만드는 데 걸린 기간은 불과 3년5개월이다. 정규사관 한 사람 길러내는 기간에도 못 미치는 기간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 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軍을 만들 수 있었고, 단기간에 편제를 갖출 수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군사경력을 갖고 국군창설에 장교로 참여한 사람들의 출신을 따져 보면 일본군·만주군·중국군과 광복군 系로 대별되는데, 일본군과 그 괴뢰 만주군은 침략자의 위치에서, 중국군과 광복군은 이에 항거하거나 대적하는 위치에서 서로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한솥 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新生 독립국의 군대를 창설하는 데 간부요원의 수요가 절대 부족하여 외국의 군사경험을 가진 사람이 軍을 외면하는 것이 야속하게 여겨지는 판국에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를 가려서 참여시킬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우리에게는 그만큼 선진의 군사지식을 배우고 충분한 경험을 쌓은 軍 경력자 한 사람이 아쉬운 형편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는 우리나라 사람이 선진 군사문화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그래서 대한제국 때부터 軍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을 시켰고, 韓日합병 후에도 새로운 군사지식을 습득한다는 민족교육 차원에서 많은 사람이 입학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운 지식을 써먹을 데는 일본군밖에 없으니 직업의 하나로 일본군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일이 흐르면서 민족교육적인 의미는 퇴색해 가고 하나의 직업으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제일 처음 일본 육사에 입학한 사람은 1886년에 입학한 朴裕宏(박유굉)이다.
 
  그 후 1895년 5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훈련대(1894년 설치)의 사관양성소 교관요원으로 당시 副領官(부영관·중령) 李秉武가 일본 육사에서 연수하였는데, 그 후에 이 사람은 중장으로 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1896년 1월 副將(부장·중장) 成暢基·趙性根, 參尉(참위·소위) 權學鎭·李大圭·王瑜植·金商悅, 생도 李熙斗·朴莊和·朴義秉·崔炳台·張命根 등 11명의 조선무관들이 특별과정 입학허가를 받고 입학하여 수학 중에 박영효가 이끄는 親日내각의 실각으로 귀국했다.
 
  일본 육사에 정규과정으로 입학하여 수학한 것은 제11기 이후이다.
 
  제11기(1898년 12월1일~1899년 11월21일)에 魚潭·盧伯麟 등 21명이, 제15기(1902년 12월1일~1903년 11월30일)에 柳東悅·李甲 등 8명이 졸업했다.
 
  魚潭은 대한제국군 중장을 지냈다. 盧伯麟(노백린)은 대한제국군 正領(정령·대령), 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1907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抗日운동을 했다.
 
  柳東悅(류동렬)은 대한제국군 參領(참령·소령)으로 있다가 신민회 사건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참모총장을 지냈고, 광복 후에 조선경비대가 창설되자 통위부장(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제23기(1909년 12월1일~1911년 5월27일. 1년 6월)를 졸업한 金光瑞(김광서. 다른 이름 金顯忠, 金擎天)는 일본군 중위로 근무하다가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고, 1920년 시베리아 연해주로 가서 고려혁명단의 지도자가 되어 抗日투쟁을 벌였다. 그 활동이 용맹하여 「백마 탄 金日成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설상의 제2대 金日成장군이다.
 
 
  韓日합병 후의 사관학교
 
 
 
  일본 육사 제26기 이후는 韓日합병 후에 입교했고, 졸업 후에 일본군에 복무했기 때문에 親日논쟁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인 동시에 국군창설에 참여해 우리 軍의 육성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일본 육사 제26기 이후 졸업하여 일본군 소위 이상으로 근무한 사람은 총 66명이다. 이 중에서 30명이 국군에 입대하였다.
 
  제26기 이후 졸업생으로 국군창설에 관여한 사람의 신상은 <표1>과 같다.
 
  1943년 10월12일, 학도동원령이 내려져 전문학교 이상의 대학생을 강제로 징집해 갔다. 이렇게 징집된 수가 4385명이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소위로 임관했고, 그들 대부분이 국군창설에 참여하여 軍의 중추가 되었다. 그중 장성에 오른 수만 87명에 이르고 수적인 면에서 일본 육사 출신을 압도한다. 일본군 중위 출신은 金相福·李永純이고, 나머지는 모두 소위다<표2 참조>.
 
  일본 항공관계 학교를 졸업한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국군창설에 참여한 사람도 있다. 공군대장 張盛煥은 일본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중위로 있었다. 공군간부 2기로 임관하여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육군 소장 朴鉉洙는 태암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있었다.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하여 군수기지사령관을 역임했다. 육군 준장 李洪鍾은 일본 제4항공기술부대를 나와 일본군 대위로 있었다. 특별임관하여 군수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38년 2월2일, 육군지원병령이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육군지원병으로 출전한 한국의 청년은 1만7664명에 이른다.
 
  이들 중 귀국하여 군사영어학교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거나 특별임관으로 국군장교가 되어 국군창설에 참여한 사람이 준장 이상만 105명에 이르러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이들의 일본군 계급은 소좌가 1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준사관·하사관과 병들이었다.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한 李龍雲 중장만이 지원병 출신 중 유일한 일본군 장교로 계급은 소좌였다.
 
 
 
 
 
 
  만주군과 일본군
 
  일본은 1931년 9월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4개월 만에 만주를 장악하였다. 만주국은 형식상의 독립국가였으므로 독자적인 군대가 필요했고, 무엇보다도 군관 확보가 시급했다.
 
  1932년 11월1일 2년제 군관양성기관으로 중앙육군훈련처를 설치하고, 軍 간부를 양성하다가 그 7년 후인 1939년 3월에 일본 육사를 본딴 4년제 정규 사관양성기관으로 신경군관학교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되자 중앙육군훈련처는 1940년 12월에 육군훈련학교로 개편됐다가 제9기를 마지막으로 폐교했다.
 
  중앙육군훈련처는 신경군관학교의 전신이고, 봉천에 위치해 통칭 봉천군관학교라고 부른다.
 
  만주의 군사교육기관으로는 군관학교 외에 1934년 7월 하얼빈에 설립한 육군군의학교와 1937년 6월에 신경에 설립된 육군군수학교가 있다.
 
  일본은 만주 군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을 선발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을 시켰다. 그러나 일본 육사에 유학했다고 해서 일본군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유학생이고 만주군일 뿐이다.
 
  일본 육사에 유학한 만주군 군관 출신으로 국군창설에 참여한 사람은 총 12명이다<표3 참조>.
 
  일본 육사에 유학한 사람을 제외하고 만주군 군관 출신으로 국군창설에 참여한 사람 중 장성급은 22명이다. 그 신상은 <표4>와 같다.
 
 
 
 
  광복군이 軍 법통을 이어받다
 
  광복군 출신은 대부분 광복군과 중국군에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이 중국군에 있다가 광복군으로 옮겨온 때문이다. 그래서 광복군 출신과 중국군 출신을 하나로 묶어서 살펴본다.
 
  이들 중 국군창설에 참여하여 준장 이상의 계급에 오른 사람은 23명이고, 이 중에 순수한 중국군 출신은 7명이다<표 5 참조>.
 
  美 군정은 장차 국군의 모체가 될 조선경비대를 창설하면서 국군의 법통 문제에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李應俊 통위부장 고문과 元容德 군사영어학교 부교장은 『광복군의 법통과 정신을 계승하고, 독립의 대의를 살리기 위하여 통위부장과 경비대총사령관은 臨政界 인사 중에서 등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美 군정은 이 주장에 따라 광복군系의 柳東悅과 이청천, 이범석 등을 후보로 삼았으나 이청천과 이범석은 중국에 머물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때 한국을 다녀간 중국 주둔 미군 총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이 하지에게 이범석을 소개하였고, 하지는 통위부장 버나드 대령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이범석과 교섭하게 하였다. 이범석은 『군정하의 경비대가 무슨 놈의 군대냐, 군사조직보다는 먼저 국권을 회복하여야 한다』면서 거절했다. 결국 이응준 고문이 추천한 柳東悅이 통위부장에 취임했다.
 
  초대 통위부장에 광복군 正將으로 임시정부 참모총장을 지낸 柳東悅이 취임하여 軍의 최고 책임자가 됨으로써 軍의 법통을 광복군이 이어가는 첫 발판을 만들었다.
 
  柳東悅 통위부장은 그러한 의미를 살리기 위하여 광북군 출신 宋虎聲(송호성)을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광복군이 軍의 법통을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을 다져 나갔다.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은 현역이어야 하므로 柳東悅은 宋虎聲을 육군사관학교 제2기에 입교시켰다. 50代 나이에 후보생 생활을 하면서 자식 같은 구대장으로부터 기합을 받고 청소도 하며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교육 중에 외출했다가 참령 계급장을 달고 나타나서 후보생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제3연대장을 거쳐서 중령으로 진급하여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柳東悅이 통위부장에 취임할 때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경비대는 글자 그대로 미국의 용병인데 광복군이 그런 용병대장 노릇을 할 수 있느냐』면서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이러한 생각은 군사영어학교를 외면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광복군 출신들의 의식이었다.
 
  柳東悅은 『이제 우리는 명분론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때가 지났소. 이제 들어가도 늦지 않으니 내가 들어가서 실질적인 광복군으로 만들어 볼 작정이오』라고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통위부장에 취임했다. 金九 선생도 그 후에 그와 같은 뜻에 공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지도 잠시에 불과했다. 軍이 제대로 체제도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6·25 남침을 당하여 법통 시비는 사라졌고, 전쟁을 치르는 동안 능력에 따른 부침만이 있었을 뿐이다.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 軍 나름대로의 법통이 형성되었다.
 
 
 
 
  목숨을 바쳐 대한민국을 구한 사람들
 
  1950년 6월25일, 북한이 남침했을 때 우리 육군은 총참모장·참모차장·참모부장이 있었고, 그 밑에 17개의 참모가 있었다. 이 20개의 직위에 일본군 출신이 11명이고, 그중 일본군 장교 출신은 10명으로 꼭 절반이다. 나머지 1명은 준위 출신이다. 만주군 장교 출신은 5명이다. 만주군을 일본군의 연장으로 보고 포함시키면 15명으로 75%가 된다.
 
  사단장 8명(수도경비사령관 포함) 중 일본군 장교 출신이 6명(75%)이고, 만주군 장교 출신이 1명이다. 사단장 8명 중 7명이 親日 시비의 대상이다.
 
  연대장은 22명이었다. 일본군 장교 출신이 11명(50%)이고, 만주군 장교 출신이 4명이다. 장교 아닌 일본군 출신이 5명이다. 만주군을 포함한 親日 시비의 대상은 15명이고, 총 일본군系가 20명(90%)이다.
 
  중요한 교육기관인 육군사관학교, 육군참모학교, 육군보병학교, 육군포병학교 등 4개 학교의 교장 중 2명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다.
 
  이상의 참모와 지휘관 및 교장을 합한 자리 수는 54개이다. 그중 일본군 장교 출신이 차지한 자리가 29개(54%)이고, 만주군이 차지한 자리가 10개이다. 이 둘을 합한 수는 39개로 72%에 해당한다.
 
  이 사람들이 벼랑 끝에 매달린 나라를 구했다. 救國(구국)의 영웅들이다.
 
  6·25 남침을 당했을 때 국군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었다. 인민군과 비교해 볼 때 수적으로 절대열세였고, 전투 장비도 많이 부족했다.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는 敵을 맞아 육탄으로 막았다. 절대열세의 戰力(전력),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엄청난 힘에 진작 손을 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도 도망치지 않았다. 투항하지도 않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죽을 때 죽더라도 버티면서 밀려갔다. 미군이 온다는 것을 알았으면 희망이나 가지고 버텼지, 그런 것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해서 미군이 올 때까지 국토의 한쪽 귀퉁이에서나마 버틸 수 있었고, 이것을 발판으로 반격하여 국토를 회복했다.
 
  그들은 연대장 이상의 지휘관으로, 사단급 이상의 사령부 참모로 몸과 머리로 싸웠고, 많이 죽고 다쳤다. 살아남아서 장군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 덕에 나라를 보존하고 민족이 살 만하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그들을 민족반역자로 처단하겠다고 한다.
 
 
  학교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이 皇國臣民誓詞
 
  나는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학교에서는 일본말만 썼다. 그래서 내가 2학년이 되었을 때는 일본말을 아무 불편 없이 쓸 정도가 되었다. 大일본제국의 신민이 된 것이다.
 
  하루 일과는 아침 조회 때 『우향우, 궁성요배 최경례(右向ケ右, 宮城遙拜 最敬禮)』를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동쪽에 「계시는」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맹서하는 禮(예)를 올리는 의식이다.
 
  학교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이 皇國臣民誓詞(コウコクシンミンノチカヒ)였다. 우리말로 번역해서 옮기면 이렇다.
 
  <一. 우리는 大日本帝國의 臣民입니다.
 
  二.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天皇陛下에 忠義를 다합니다.
 
  三. 우리는 忍苦鍛鍊하여 훌륭하고 강한 國民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아동용이고 성인용 皇國臣民誓詞는 따로 있었다. 똑같이 세 소절로 되어 있으면서 내용이 달랐다. 동네에 야학을 차려놓고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ㄱ) 자도 모르는 무식한 농민들에게 열심히 가르쳤다. 물론 國歌 「君ガ代」도 배웠다. 천황을 찬미하는 노래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천황폐하께 충성하는 것과 황국신민이 되는 길이었다. 「朝鮮」이란, 大일본제국 중에서 內地(일본 본토)와 구분되는 한낱 지역의 이름으로 알았고, 독립된 朝鮮이나 대한제국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으며, 배운 바도, 들은 바도 없었다. 곧 일본은 우리나라(我ガ國)였다.
 
  내가 처음 입학했을 때 교실에 커다란 大東亞地圖(대동아지도)가 걸려 있었다. 빨간색으로 칠해 놓은 朝鮮과 內地(일본) 그리고 臺灣(대만)을 묶어서 가로지른 큰 글씨로 「大日本帝國」이라고 표시되어 있었고, 「朝鮮」 위에 분홍색으로 표시된 「滿洲帝國」이 있었으며, 그 서남쪽에 푸른색으로 칠한 큰 나라를 「支那(중국)」라고 써 놓았다. 그때 우리는, 「支那」는 일본의 敵이라고 배웠고, 擊滅(격멸)해야 할 대상으로 알고 있었다. 요즈음 말로 아이들을 왕따시킬 때는 「支那人(시나징)」이라고 놀렸다. 가장 기분 나쁘고 불쾌한 말이었다.
 
  나는 어린 심정에도 「우리가 사는 朝鮮이 적국인 支那와 인접하지 않고 그 중간에 滿洲帝國이 막고 있어 큰 다행이구나」하고 생각했었다.
 
 
  신사참배와 창씨 개명
 
  午鍾(오종·사이렌)이 울리면 천황폐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安寧을 비는 묵념을 했다. 정오에 울리는 종이라고 하여 오종이라 했고, 낮 12가 되면 경찰서에서 사이렌을 울려서 시간을 알렸다. 소를 먹이다가도, 꼴을 베다가도,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도 심지어 집안일을 거들다가도 일어서서 경건하게 묵도를 했다. 신사참배도 열심히 했다.
 
  나의 큰형님은 징용 갔고, 뒷집의 사촌형님은 지원병으로 입대했다. 사촌형님 덕에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 합격하는 특혜를 받았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의 이름은 柳川亨錫(유천형석)이었다. 창씨하면서 성 밑에 「川」자를 한 자 더해 된 것이 아니라, 「야나가와 고우샤쿠」가 된 것이다. 亨錫은 冠名이었으므로 집에서는 불리지 않다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처음 불리면서 「고우샤쿠」가 되었으니 완벽한 일본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본이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일본은 神國이라고 배웠고, 전쟁을 하면 神이 돕기 때문에 반드시 이긴다고 배웠다. 그래서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럴리가 없다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철저한 일본 사람, 아니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이 되어 있었다.
 
 
  독립운동 안 해서 親日派라는 것인가
 
  학생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反美운동도 배고프면 못 한다. 하기 싫으면 안 한다. 민주화운동 안 했다고 反민주인사로 몰 것인가. 反美운동 안 했다고 親美派로 몰 것인가. 독립운동 안 했다고 親日派라고 할 것인가.
 
  일제의 식민치하에서 「황국신민」 아닌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일제치하에서 한 親日은 광복과 더불어 뿌리째 잘려 나갔다. 하고 싶어도 못 하고 할 수도 없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剖棺斬屍(부관참시)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그 자손에게 족쇄를 채우겠다는 것인가.
 
  일제가 패망했을 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는 것도, 가진 것도, 관공서도·경찰서·학교도, 은행·회사도 텅텅 비어 있었다. 질서는 문란했고, 사회는 혼란했으며, 국민은 불안했다.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챙겨야 할지 몰랐다. 그때 우리에게 가장 요긴했던 것이 바로 일본 사람과 함께 일하면서 배우고 익힌 기술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하면 親日派로 불려야 마땅할 이들이 더듬거리며 배워 가면서 일을 헤쳐 나갔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사회를 이끌고, 후진을 기르며, 사회와 국가를 안정시키고 발전시켰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이 나라를 견인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른 親日의 빚을 갚았다. 일본군 출신들의 문제도 그 한 예다. 일제시대의 혹독한 시련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광복 후의 혼란 속에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이, 6·25의 참상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 누구를 어떻게 조사하여 과거를 청산하겠다는 것인가.
 
  그들을 민족반역자로 만들었을 때 좋아할 사람은 누구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