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축음기의 발명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것은 1877년의 일이지만 음반이 대량생산돼 시판되기 시 작한 것은 1897년 EMI의 전신인 그라모폰사가 런던에 설립되면서 부터다. 레코딩은 음악사에서 악보 인쇄술의 발명에 이은 기술혁명으로 음악의
대중적 보급과 상업화 추세를 몰고 왔다.
발명왕 에디슨이 1877년 11월 미국 특허국에 제출한 축음기의 이름은 '토킹 머신'.글자 그대로 말하는기계에 불과했 다.1878년 에디슨은 수첩에다 자신이 발명한 유 성기(留聲機)의 용도를
▶속기사없이 받아쓰기
▶시각장애자의 독서
▶웅변 교육용
▶음악의 녹음과 재생
▶사람의 육성이나 유언의 보관
▶뮤직박스나 장난감용
▶귀가시간과 식사시간을 알리는 기능
▶발음의정확한 교정
▶강의노트 필기대용
▶전화통화 내용의 영구보존 등 10가지로 메모해 놓았다.
지금도 녹음기는 이같은 다양한 기능으로 사용되지만 에디슨 자신도 이 기계가 음악의 녹음과 재생을 위한 수단으로 널리 보급돼 음악의 상품화를 재촉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1877년 8월12일 에디슨은 뉴저지에 있는 작업실에서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채 사상 최초의 녹음을 시도했다.
그때 노래는 유명성악가나 바이올리니스트도 아닌 자신과 친구들이 함께 부른 동요, 메리에게 작은 양이 한 마리 있다네(Mary Has A Little Lamb)'였다.
그러나 에디슨의 녹음 방식은 왁스를녹인 원통에 바늘로 기록하는 것으로 오늘날 처럼 대량생산을 위한 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에디슨의 축음기는 1878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출품됐다.
그후 1888년 런던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열린 헨델 페스티벌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이
에디슨 의 축음기로 녹음됐다. 에디슨 이전에도 녹음기 발명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57년 프랑스 발명가 레 옹 스콧이 '포노토그라프'라는 원시적 형태의 녹음기를 만들었다.
오늘날과 같은 평평한 원형 음반에 소리가 담긴 것은 독일 하노버 태생의 발명가 에밀 베를리너가 미국에서 음반 제작에 성공하면서 부터다. 그 후 워싱턴에서 그라모폰사를 설립했다.베를리너는
1897년 7월 윌리엄 배리 오언을 런던에 파견,유럽시장 개척은 물론 유럽 출신 아티스트들의 녹음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1898년 영국 최초의 레코딩이 이뤄졌다.이것이 올해로 탄생 1백주년을 맞는 세계 최고(最古)의 레이블 EMI의 시작이었다.
이듬해인 1898년 그라모폰사가 독일로 진출하면서 도이체 그라모폰사가 창설됐고,
1903년 RCA의 트레이드 마크인 '붉은 딱지(Red Seal)'의 출범과 함께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팔리아치' 중 '의상을 입어라' 를 녹음, 판매고 1백만장을 돌파한 최초의 클래식 음반으로 기록된다. 지금까지도 출반되고 있는 RCA의 레드 실 시리즈는 음반사상 최장수 시리즈로 남아있다. 그 당시엔 요즘처럼 긴 교향곡은 엄두를 못냈고 짧은 클래식 소품과 코믹 송, 대중적인 춤곡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녹음했다.
2. 축음기의 위력
에디슨의 축음기 발명은 왁스를 입힌 종이 디스크에 모르스부호를 기록하기 위한 실험의 부산물이었다. 원반형 디스 크 를 고안해낸 에밀 베를리너(1851~1929)도 처음엔 자신이 개발한 기계의 용도를 제대로 몰랐다.그는 축음기를 가리켜 '말하는 장난감'이라고 부르곤 했다.
1890년대 런던.파리 등 대도시 번화가에서는 축음기에 이어폰을 연결해 놓고 손님들이 동전을 넣으면 녹음을 재생해 듣는 업소들이 생겨났다. 녹음은 지금처럼 음악보다 휘파람으로 연주한 노래나 만담.민요등이 대부분이었다.
또 한가지 염두에 둬야할 것은 레코딩 역사를 살펴보면 대중음악이 음반산업의 운명을 좌우하는 요즘과는 달리 초창기에는 대부분의 녹음이 클래식음악이었다는 사실이다. 1890년 러시아를 방문한 에디슨은 저명한 음악가들에게 자신이 발명한 축음기를 보여주었다.작곡가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축음기의 위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축음기를 들어보고 이 천재의 발명품에 놀랐다.나는 음악가로서 이 기계의 음악적 가능성을 충분히 예견한다.음악작품의 뛰어난 연주와 아름다운 목소리,민요나 즉흥연주를 정확히 재생할 수있다는 사실은 음악에서 엄청나게 중요하다.
축음기는 빠르기를 조절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도 갖고 있다.위대한 에디슨에게 영광있으라!”그가 에디슨에게 써준 추천장의 내용이다.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예측은 정확했다. 1894년 러시아의 민요연구가 예브게 니리네바는 축음기를 들고 볼가강 유역에서 민요를 수집해 악보로 출간했다.헝가리 작곡가 바르토크와 코다이의 민요수집도 축음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축음기 발명 이후 음악가가 남긴 최초의 녹음은 1888년 당시 12세던 폴란드 태생의 천재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이 에디슨의 스튜디오를 방문해 녹음한 피아노 연주다.
또 1893년 브람스가 세상을 떠나기 4년전 피아노 연주로 직접 녹음한 '헝가리춤곡'이 1935년에 발견됐다. 프랑스에서는 1894년 에밀 파테가 파리 교외에 음반사를 설립하고 스코틀랜드출신의 소프라노 메리 가든(1874~1967)등 유명 성악가의 연주를 녹음했다.
3.휴대용 축음기의 탄생
에디슨은 축음기를 전화처럼 빌려주어 임대료 수입을 올릴 계획이었다.반면 최초로 디스크를 발명한 에밀 베를리너는 축음기를 가정용 오락기기로 생각했다.또 유명한 가수나 연주자의 곡을 담은 음반을 대량생산,음반판매에 대한 로열티 수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디오가 처음 나왔을 때처럼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의 홍보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그러나 20년대부터 대부분의 가 정에 축음기가 보급되면서 하드웨어(축음기)보다 소프트웨어(음반) 판매에 더욱 치중하게 되었다.
“그라모폰(축음기)을 만들면서 음반을 만들지 않는 회사는 마치 면도기를 만들면서 면도날을 만들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28년 데카가 주식회사로 발돋움하는데 크게 기여한 증권업자 에드워드 루이스의 말이다.
역사상 최초의 협주곡 음반은 1910년 랜던 로널드경이 지휘하는 뉴심포니오케스트라가 녹음한 그리그의'피아노협주곡'이다. 당시 26세의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가 협연자로 선정됐다.물론 1악장도 반쯤 잘린채 녹음됐다.
1914년 미국에만 소노라.에올리언.브룬스위크(당구대와 볼링 생산업체)등이 가세해 2년후엔 모두 4백46개 업체가 음반업에 종사했다.
같은 해 1차대전이 발발하자 그라모폰사의 많은 직원이 일자리를 잃었고 남은 사람들도 월급이 4분의3으로 줄어 음반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하지만 전화위복이라는 말처럼 나중엔 오히려 음반산업이 전쟁 특수(特需)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1914년 악기제조업체인 바네트 새뮤얼로 출발한 데카사가 이듬해에 개발한 음반사상 최초의 휴대용 레코드 플레이어인 데카 둘세폰.무려 10만여대가 보급돼 영국군 참호속에서 사기를 북돋우는등 인기를 끌었다.
전쟁이 끝난 후 데카는 둘세폰을 가리켜'혁혁한 전과를 거둔 전쟁영웅'으로 치켜세우면서 홍보전을 펼쳤다.“전쟁에서 너는 무엇을 했는가.데카여!” 한편 빅터 토킹 머신사의 엘드리지 리브스 존슨 사장이 피아노와 같은 고급 마감재를 사용한 축음기 빅토롤라를 개발,축음기는 훌륭한 가구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4.니퍼 이야기
영국 브리스톨 프린스 극장 소속의 무대미술가 마크 바로드에겐 니퍼라는 이름의 귀여운 개가 있었다.주인이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니퍼는 동생인 프랜시스의 집으로 옮기게 됐다.형처럼 화가였던 프랜시스는 어느날 에디슨 축음기를 듣고 있는 니퍼의 진지한 표정이 대견스러워 이를 화폭에 담았다.1899년 1월 완성된 이 그림의 제목은 '그의 주인의 목소리'(His Master's Voice)였다.
프랜시스는 이 그림을 특허청에 등록한 다음 에디슨 벨사에 가서 상표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금빛 나팔을 그려넣으면 그림이 돋보일 것이라는 충고를 듣고 나팔을 빌리려고 그라모폰사를 방문했다. 그때 마침 그는 그림을 찍어 놓은 사진을 들고 갔다.사진을 보고난 윌리엄 배리 오언 사장은 프랜시스에게 에디슨 축음
기 대신 자사 제품을 그려넣으면 그림을 사겠다고 약속했다.그해 10월17일 그는 그림을 넘겨주고 1백파운드를 받았고 1913년부터 10여년간 24장을 추가로 그렸다.런던을 방문한 에밀 베를리너는 오언의 사무실에 걸려있는 니퍼 그림을 보고 상표권을 사들였고 미국 빅터 토킹 머신사도 니퍼를 상표로 사용했다.그래서 니퍼 그림이 RCA빅터 상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EMI의 전신인 그라모폰이 원래 주인이다.
이 그림을 처음 발굴한 그라모폰사가 1899년부터 사용해오던 깃털펜으로 디스크의 홈을 파는 천사(에인절)그림과 함께 니퍼(HMV)를 상표로 사용한 것은 1909년부터.이 상표는 지난 91년3월 붉은색 네모꼴의 EMI클래식스라는 로고가 탄생될 때까지 사용됐다. 80년대 RCA빅터사를 인수한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사도 새로운 상표로 니퍼와 그의 꼬마친구 치퍼를 내세웠다.
4.음반 레이블
1899년 미국인 앨프리드 클라크가 파리에 음반사를 설립했다.그가 미국에서 데리고 온 엔지니어 클리블랜드 월코트는 연주자를 겸하고 있는 작곡가의 녹음을 보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사실을 깨달았다.연주나 해석에서.작곡자의 의도' 가 중시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 녹음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이 더욱 돋보였던 것이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파블로 사라사테의 자작곡 연주에 이어생상스.드뷔시.그리그가 연주하는 피아노 연주를 녹음에 담았다.
손잡이를 돌리는 수동식 녹음이라 턴테이블의 회전속도가 불규칙해다소 음정이 떨어지지만 그리그 특유의 우아하고 정교한 연주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처음엔 녹음기술의 한계로 주로 성악이나 바이올린 독주를 선호했다.1903년 발매된 앨범으로 테너 엔리코 카루소는 녹음료 2백리라를 받았고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음반사로부터 20만 파운드짜리 수표를 받았다.1년 동안 판매된 음반에 대한 로열티였다.카루소가 남긴 음반은 1백60종에 이른다. 1901년 그라모폰사 최초의 레코딩 프로듀서인 프레드 가이스버그는 차이코프스키의 친구였던 테너 니콜라이 피그너와 전설적인베이스 페오도르 샬리아핀과의 녹음계약을 위해 급히 러시아로 떠났다.
에밀 베를리너가 영국에 파견한 윌리엄 배리 오언은 1897년 EMI의 전신인 그라모폰사의 사장에 취임한다.그가 내놓은 음반 레이블은 HMV이었다.지금은 다국적 대형 음반매장의 이름으로 남아있다.하지만.그라모폰'은 음반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1923년 세계 최초의 음반전문 잡지로 창간된.그라모폰'과 1898년 독일 하노버에 설립된 '도이체 그라모폰'(DG)의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948년 비닐 디스크가 출현할 때까지 사람들은 바늘이 음반을 긁을 때 나는 소음을 음악과 함께 들어야 했다.음반의 양면을 모두 사용한 것은 1905년 베를린의 오데온사가 그 시초다. 그러나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음반 한장에 담을 수 있는 녹음은4분30초에 불과해 대부분의 실내악.관현악곡은 녹음될 때.가위질'을 거쳐야만 했다. 최초의 협주곡 녹음은 1910년 랜던 로널드경이 뉴심포니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녹음한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이다.피아노는 당시 26세의 빌헬름 박하우스가 맡았다. 하지만 제1악장은 너무 길어 반쯤 잘라 먹었다. 해결방법은 회전속도를 늦추는 것이다.1분당 78회전에서 33회전 또는 45회전으로 늦춤으로써 음반 한면에 30여분을 담을수 있는 LP의 탄생은 그런 의미에서 음반사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5.最古의 피아노 녹음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피아노 녹음은 1889년 브람스가 직접 연주한 그의.헝가리 춤곡 제1번'.2년전 12세의 천재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이 에디슨 연구소를 방문해 녹음한 실린더는 독일에 있는 호프만의 집에 보관돼 있다 1차 대전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또 차이코프스키가.자신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의 일부를 실린더 축음기로 녹음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펠링거가(家)의 저택에서 녹음된 브람스의 레코딩은 에디슨의 유럽 담당이었던 테오 방게만이 제작을 맡았다..헝가리 춤곡'의 13~72소절을 담은 이 역사적인 녹음에서 소음을 제거하려는 기술적 연구가 몇차례 시도 됐다. 35년 프리츠 보제 박사는 이 실린더를 LP음반으로 복각했다. 실린더 원본은 베를린의 프로이센 국립도서관에보관돼 있다가 한때 2차대전 동안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983년 코바.레흐라이트너.쉴러등 세사람으로 구성된 연구팀이 동베를린의 독일국립도서관에서 다시 발견했다.이들은 실린더를 LP로 복각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대영도서관의 국립음향보관소에 소장중인 브람스 레코딩은 루드비히 코흐 컬렉션에서 나온 것인데 보제박사의 LP복각을 직접 복사한 것이라 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빈의 축음기보관소에서 온 연구팀이 대영도서관 레코딩을 음반으로 재현,소음제거에는 성공했으나 원래의 연주에 대한 음악적 정보 전달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최근 예일대 음악공학연구소가 원래의 뉘앙스를 살리면서 소음제거를 위한 연구끝에 레코딩중 일부를 비교적 선명하게 들을 수 있게 됐다.현재 쉽게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브람스가 에디슨 실린더 포노그라피로.에디슨 박사에 대한 인사'와 함께 2분짜리 연주를 담은 역사적인 녹음은 펄 레이블(문의 208-5333)로 나온 6장 짜리 CD세트.클라라 슈만의 제자들'(GEMM 99049)에 담겨 있다.
5. 초창기의 클래식 녹음
음반사상 판매고 1백만장을 돌파한 첫 레코딩은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1904년 RCA레이블로 녹음한.팔리아치'중 아리아.의상을 입어라'다.초창기의 녹음장비는 충분히 들고다닐 수 있어 연주자가 묵고있는 호텔에서 레코딩이 이루어졌다.녹음 방법도 간단해 원뿔형 나팔에 대고 노래하면 됐다.그 결과는 마치 도박과도 같았다.녹음만 잘되면 엄청나게 비싼 값에 팔 수 있었지만 실패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1907년 소프라노 넬리 넬바는 아예 자신의 이름을 딴 음반회사를 차리고 단면으로 된 12인치 음반을 14장 발매해 21실링씩에 판매했다. 당시 샬리아핀의 음반보다 1실링 비싼 가격이었다. 초창기 녹음에서 각종 현악기.관악기가 한꺼번에 등장하는관현악 녹음은 매우 힘들었다.당시 녹음기술로는 저음역을 담당하는 현악기(첼로나 더블베이스)소리를 담을 수 없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금관악기(트럼본)와 목관악기(바순)가 이들 파트를 연주했다.또 바이올린 독주도 원통 가까이서 연주할 수 있어 널리 녹음됐으나 역시 높은 음역의 배음이 잡히지 않아 마치 플루트 같은 소리만 났다.
최초의 오페라 전곡 녹음은 1907년 밀라노 스칼라극장에서 작곡자의 지휘로 녹음된 레온카발로의.팔리아치'.이탈리아 작곡가카발로는 레코딩에 특히 관심이 많아 그라모폰사의 녹음을 위해 가곡을 특별히 작곡했고 카루소의 녹음 때도 반주 자로 나섰다.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가 녹음한 최초의 전곡 녹음은 1913년 도이치 그라모폰사가 아르투르 니키시 지휘의 베를린필하모닉과녹음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다.
물론 비좁은 스튜디오에 들어가지 못한 더블베이스와 팀파니는 제외됐다. 1925년 미국의 웨스턴일렉트릭컴패니가 최초의 전기녹음 방식을 개발했다.같은해 12월 랜던 로널드 경이 로열 앨버트홀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녹음한 차이코프스키의.교향곡 제4번'(HMV)이 전기녹음 방식에 의한 최초의 교향곡 앨범이다 . 33년께 영국에서 판매되던 클래식 음반의 레퍼토리는 폭이 매우 좁았고 짧은 소품이 대부분이었다.같은 곡을 여러 명의 연주자가 각기 녹음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가령 헨델의.라르고'는 37종,요한 슈트라우스의.아름답고 푸른 다뉴브강 왈츠'는 41종,바흐.구노의.아베마리아'는 30종이 시판되고 있었다.
8. 전기녹음 방식의 등장
1920년대초부터 레코드 산업은 성장가도를 달렸다.클래식 뿐만 아니라 대중가요나 뮤지컬 히트송 녹음도 활발해졌다.적은 자본으로 음반사를 차릴 수 있어 너도 나도 레코드업계에 뛰어들었다.
라디오 발명과 함께 음반 역사상 최초로 전기녹음방식이 도입된다.에디슨의 포노그래프와 마찬가지로 전기녹음방식도 전화기술 연구의 소산이었다. 1919년 벨연구소 소속 라이노넬 게스트와 메리먼은 전기녹음방식을 첫선 보인 후 이듬해 웨스트 민스터성당에서 1차세계대전 휴전기념일에 열린 무명용사 안장식 실황을 녹음했다.
전기녹음방식의 핵심인 마이크와 앰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대형 나팔 앞에 연주자들이 비좁게 서서 녹음할 수밖에 없었다.보면대를 놓을 공간도 없어 악보를 천장에 줄로 매달아 놓고 연주했다.또 강한 소리를 내는 악기나 사람 목소리만 두드러지게 들리는 경향이 있었다.
녹음과정에서 전기를 이용하기 시작했지만 초기에는 여전히 수동식으로 음반을 재생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쿠스틱 레코딩에 비해 음량이 엄청나게 커졌고 잡음이 현저하게 줄었다.또 무엇보다도 저음의 재생이 놀랄 정도로 향상됐다.
전기녹음방식은 단순히 음질 개선의 차원을 넘어 레코딩 자체에 대한 개념 변화로 이어졌다.어쿠스틱 레코딩에서는 엔지니어들이 가능한 한 음원(音源)에 충실한 녹음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지만 전기 녹음방식의 도입으로 엔지니어의 '조작'에 의해 녹음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마치 음반을 듣는 사람이 공연장이나 스튜디오에 와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일종의 청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게됐다.
전기녹음 방식의 등장과 함께 근대적 의미의 레코딩 스튜디오가 잇따라 문을 열었다.연주자의 세계와 별개로 존재하는 엔지니어의 공간, 즉 컨트롤 룸이 딸린 대형 스튜디오가 레코딩 아티스트들의 삶의 현장이 돼 버렸다.
9.LP의 등장
1948년 6월 어느날 아메리칸 컬럼비아사는 1분간 78번 회전하는 종래의 SP(short play) 레코드와는 다른 33⅓회전 LP(long play) 레코드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소재(플라스틱)와 크기는 동일하지만, 녹음선, 혹은 소릿골을 보다 촘촘히 새겨넣은 '마이크로 그루브(micro groove)' 녹음 이었다.
한달뒤 '라이프' 표지에 LP를 개발한 피터 골드마크 박사가 8피트 높이로 쌓아둔 SP판 옆에서 이 판들을 옮겨 녹음한 LP를 한손에 들고 있는 사진이 실렸다. 골드마크 박사는 원래 컬럼비아 방송사의 컬러TV 개발책임자였으나, 그 자신 첼리스트로 클래식음반을 듣는 것이 취미였다. 당시 SP는 12인치짜리 한쪽면에 불과 4분정도 음악을 수록, 연주시간이 긴 클래식음악을 담아 내는데 많은 제약이 따랐다. 한 예로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곡을 담는데 무려 50장의 SP판이 필요했다. 4분마다 판을 바꿔가며 음악을 듣는 번거로움에 진력이 난 그는 컬럼비아레코드사에 LP 개발을 건의, 자신의 책임 아래 3년간 연구끝에 비닐디스크 한쪽 면에 27분간 음악을 담는데 성공했다. 음역도 크게 넓어지고, SP와 달리 쉽게 부서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LP의 최초 발명자는 토머스 에디슨회사였다. 1926년 에디슨회사가 '마이크로 그루브 LP', 즉 단면 20분짜리 12인치음반 6개, 12분짜리 10인치 음반 8개, 그리고 이를 위한 축음기 다섯종류를 시판했다. 그러나 이 LP는 상품화에 실패, 이듬해 생산이 중단됐다. 그 이유는 1인치 폭에 1백50개의 녹음선을 넣던 종래 디스크에 무리하게 4백50개의 녹음선을 넣어, 오래 틀지 않아 닳아서 소리가 망가졌다.
RCA사도 1931년에 지금 LP와 같은 33⅓회전의 LP를 시판했다. 당시 인기가수 다이나 쇼어 등의 음반으로 RCA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앰프를 기기에 부착해야하는 등의 어려움으로 또한 실패했다.
컬럼비아사가 성공한 첫째 이유는 2차대전중에 플라스틱산업이 발달, 비닐제품이 실용화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그네틱테이프에 마스터녹음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컬럼비아사의 LP는 발명특허권을 갖지 못했으므로 모든 레코드사들이 LP생산을 서둘렀다. 자존심이 상한 RCA는 45회전 7인치음반(소위 도너츠판)을 생산해 대항했으나 1950년부터 컬럼비아사를 따랐다. 유럽에서는 데카사가 1950년부터 LP를 시판했으나 정작 음반역사의 시조인 EMI는 사장 어네스트 피스크의 무관심으로 1952년에야 LP생산을 시작했다. 이로써 50년간 사랑받던 SP는 골동품으로 퇴장하고 하이파이시대가 열렸다.
10.음반변천 `산 증인' 컬럼비아사
토머스 에디슨이 1877년 축음기를 발명, 포노그라즈 라는 이름하에 특허를 받았다. 소리를 재생할 수 있다는 사실 이외는 실용가치가 없어 에드슨은 축음기에 흥미를 잃었다. 그후 8년 가까이 축음기는 제쳐놓고 전구의 개량에 열을 올렸다. 그동안 전화기 발명자 그라함 벨의 연구진은 에디슨의 은박지 비슷한 「틴포일」 대신에 실린더 음반을 개발해서 아메리칸 그라포폰(American Graphophone)사를 설립하고 에디슨에게 합작을 제의했다.
갑자기 나타난 라이벌을 맞은 에디슨은 합작을 거부하고 그 자신도 실린더 음반을 만들었다. 곧 법정싸움이 벌어졌다. 에디슨은 벨이 축음기특허를 도용했다고 주장했고, 벨은 에디슨이 실린더 특허를 도용했다고 몰아쳤다. 이때 리핀코프라는 사업가가 두 사람을 화해시키더니 두 회사의 축음기와 실린더의 독점판매권까지 따냈다. 그는 「북미 그라포폰」사와 자회사들을 각지에 설립하고 축음기를 관공서나 회사에 대여했다. 사업이 부진해 다른 자회사는 다 파산 했으나 수도 워싱턴 주위를 맡은 콜럼비아사만 흑자를 올렸다. 이 회사는 역시 파산지경에 이른 벨의 「아메리칸 그라포폰」사를 흡수해 실린더와 축음기를 만들어 판매했다. 그로부터 에디슨기계는 「포노그라프」, 빅타와 H M V기계는 「그라마폰」, 그리고 콜럼비아기계는「그라포폰」이라고 불렸다.
콜럼비아는 디스크음반의 우수성을 일찍 깨달아 1901년부터 이를 생산, 1910년에는 실린더 기계와 실린더 음반생산을 전면중단했다. 콜럼비아는 카루소 등 오페라가수들을 녹음한 그라마폰회사에 대항해서 1903년에 당대의 정상가수들 셈브리치(소프라노) 슈만-하인크(알토), 레지키(바리톤) 등을 녹음한 33개의 오페라판을 시판했으나 더 진전하지 못했다. 콜럼비아는 1910년경부터 다시 클래식음반에 힘을 들였다. 보닝세나(소프라노), 비스팜(바리톤), 콘스탄티노(테너) 등을 녹음했으나 카루소, 멜바, 파티를 가진 빅타의 레드실에는 역부족이었다. 콜럼비아는 1910년대 중반 H M V와 빅터가 오페라가수의 녹음에 치중할때 과감하게 관현악녹음을 시작 했다. 지휘자 「토마스 비첨」등과 계약해 관현악을 녹음한 것이 예상외로 크게 성공하여 그라마폰과 빅터사로 하여금 관현악녹음을 서두르게 했다. 콜럼비아는 또한 바이올리니스트 「이자이」(1913년) 첼리스트 「카잘스」(1915년) 피아니스트 「부조니」(1922년)를 녹음하고 1924년부터 빅터의 레드실레이블에 대항, 「콜럼비아걸작선(Columbia Master Works)」을 내 놓으며 많은 명반을 남겼다. 콜럼비아는 1948년 LP를 처음 내놓아 빅터를 앞질렀다.
11.[오디오] 레코드 1백년…그을린 유리판서 DVD까지
올해로 레코드가 탄생한지 꼭 1백주년. 바로 영국 EMI레코드사의 역사다. 마이크가 개발되기 전 소리를 직접 녹음하던 `어쿠스틱'방식부터 SP-LP-CD-DAT-MD를 거쳐 최근의 `디지털 비디오디스크'DVD 까지, 연주내용을 음반에 기록하는 레코드기술은 눈부신발전을 이뤘다.
1870년 4월 어느날 에밀 베를리너(1851∼1929년)라는 19세의 독일청년이 미국행 이민선에 올랐다. 특별한 학력이나 뚜렷한 기술을 갖지 않은 이 청년은 그저 신대륙에 꿈을 두고 고향 독일의 하노버를 등진 것이다. 이국땅에 내린 베를리너는 직장을 찾아 이도시 저도시로 헤맸다. 5년후 뉴욕에서 사카린을 발명한 팔버그박사의 연구실에 취직이 되었다. 그는 연구에 관심이 많아 시간만 있으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재미있게 읽은 책은 「물리학과 기상학의 개요」라는 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전기와 음향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그 직장을 그만두고 워싱턴으로 가서 낮에는 가게에서 일하고 밤이면 방에 들어앉아 연구를 시작했다. 1870년에 그 당시의 전화기인 마이크로폰보다 훨씬 성능이 우수한 마이크로폰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는 벨」전화회사에 7만5천달러를 받고 특허권을 팔았다. 그는 이돈으로 연구실을 차렸다. 베를리너에게 가장 관심이 가는것은 1877년 토마스에디슨(1847∼1931년)이 발명한 축음기였다. 에디슨의 축음기는 큰 단점이 있었다. 그 당시의 실린더(원통형) 레코드는 재생음은 비교적 좋았으나 문제는 한번 녹음에 실린더 한 개밖에 만들 수 없었다. 즉 10개의 실린더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수가 큰 나팔앞에 서서 큰소리로 똑같은 노래를 10번을 불러야 했다. 이로 인해 축음기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은 되었으나 그 이용도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때 베를리너는 눈을 번쩍 뜨게하는 기사를 어느 잡지에서 발견했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하기 7개월 전에 발간된「사이언스 아카데미」잡지에 프랑스의 화학자며 의사-시인- 발명가인 찰스 크로스(1842∼1888년)가 기고한 음향재생 가능성에 대한 기사였다.즉 평평한 유리디스크에 녹음하여 그 소리를 재생할수 있다는 기사였다. 베를리너는 곧 실험에 몰두했다. 유리판을 촛불에두껍게 그슬려서 녹음한 것을 손으로 돌리는 판에 얹어서 바늘을 대어보니 소리가 재생되었다. 즉 요즘의 턴테이블의 발명이었다. 그는 3년동안 수많은 실험끝에 상업적으로 가능한 원반레코드를 만드는데 성공해 발명특허를 낸 것이 1887년, 그리고 다음해에 필라델피아 프랑크린 인스티튜트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그러나 그의 발명이 실제로 상으로 시중에 나오는 데는 많은 시일이 걸렸다. 미국에 베를리너회사를 설립한 후 런던에 세운 것이 「그라모폰」회사, 곧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EMI레코드사의 탄생이다.
조선시대의 축음기
|
흥선대원군 집정시절인 1866년 쇄국 조선에 통상을 강요해온 오페르트 라는 독일 상인이있었다. 아산만에 정박한 오페르트가 통상을 위한 미소책으로 해미현감과 관원들을 선상으로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다 포도주와 양식으로 대접받는 그 자리에 이 해안을 지키는 조선군 한 대령이 끼여 있었다.
오페르트는 서양문명을 자랑하여 기를 죽이려고 축음기를 틀었다. 현감은 눈을 감고 못들은체 은인자약 하는데 대령은 멈칫 몸을 피한 것은 잠깐이요 흘러나온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서양노래에 조선춤인지라 우습기 짝이 없었다고 오페르트는 적고 있다. 이것이 한국인의 축음기와 의 최초의 만남인 것이다.
이 오페르트가 갖고 왔던 축음기는 그 연대로 미루어 1857년에 영국인 리온 스코트가 발명했다는 축음기일 확률이 높다. 그런 축음기 해프닝이 있은지 31년후인 1897년의 일이다. 당시 미국 공사이던 앨런이 미국으로부터 축음기 한대를 도입하여 조선의 대신들을 불러모은 가운데 이를 틀었다.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난정치를 끝낸지 얼마되지 않은 때인지라 친로파 인사가 많았다. 외부대신인 조병식과 친로 세도로 주름잡던 김홍륙도 그중에 있었다. 당시의 축음기는 원반형으로 된 레코드가 아니라 1877년에 에디슨이 발명한 원통형으로 현장 녹음과 재생이 가능한 축음기였다.
연회식이 벌어진 그 식장에서 앨런이 환영사를 하고난뒤 한국측에서는 대신 한 사람이 답사한 내용을 이 축음기에 녹음하여 놓았다가 재생을 한 것이다. 처음 보는 이 흉내내는 기계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색다른 물건은 마음을 홀리는 요물이기에 (완물상지) 그것을 보고 듣고도 마음을 동요해서는 안된다는(희노불형어색) 유교의 가르침에 투철한 분들인지라 이를 틀어 놓아도 짐짓 건기침을 하거나 돌아앉거나 천장을 올려보고 일부러 못들은척 했던 것이다.
이 신기한 외래문물을 둔 부동심이야말로 신앙에 가까운 한국의 도덕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앨런 공사는 감탄하고 있다. 이 한국 최초의 축음기와 동형의 것이 우리 나라 참소리 축음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원통형 실린더에 2∼6분 동안 녹음 재생되는 「딕타폰」임을 알 수 있다.
말과 소리를 비축했다가 이를 재생한다 하여 사음기 축언기 자음기 소언기 유성기라고도 불렸던 축음기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지 |
'오디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이엔드 오디오 (0) | 2012.08.14 |
---|---|
북셀프스피커 비교청취 (0) | 2008.10.01 |
LINN(린) SONDEK LP12 SE (0) | 2008.06.24 |
진공관 자작 동영상 (0) | 2008.06.20 |
중고 오디오 구입요령 (0) | 2008.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