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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은 한이 많은 기업인이다. 맨땅에서 시작해 라면 종가를 일궈내기까지 30년 청춘을 바쳤다.
이제 기업인으로서는 느긋한 말년을 보낼 법도 한 시기에 맞이하게 된 우지파동. 그것은 정직과 신용을 생명처럼 여기는 전 회장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1989년 공업용 소뼈를 들여와 라면을 만들어 판매했다는 검찰 발표는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7년 9개월에 걸친 법정 공방을 통해 검찰이 사실을 일부 오인해 진실이 왜곡된 사건으로 최종 판명됐지만 삼양식품은 한 번 실추된 기업 이미지를 쉽게 회복할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7년 불어닥친 외환 위기는 회사를 존폐 위기로까지 내몰았다. 삼양식품 임직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절치부심하는 심정으로 뛰었고 지난 3월 말 화의를 마치고 라면 원조기업으로서 부활을 선언했다.
45년 동안 묵묵히 라면 외길을 고집해 온 전 회장을 만나 인생역정을 들어봤다.
올해 87세인 그는 "이미 늙었기 때문에 늙을 수가 없었고 할 일이 많아서 죽을 수가 없었다."라며 우지파동 후 어려웠던 심경을 피력했다.
전 회장이 라면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60년 초반이었다.
당시 보험회사 동방생명 부사장이었던 전 회장은 우연히 남대문시장을 지나가 다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남이 먹고 남은 것을 모아서 드럼통에 넣고 다시 끓인 음식)"을 사먹기 위해 줄을 길게 선 것을 보고 국내 식량 자급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때 전 회장은 과거 일본을 방문했을 때 라면을 시식했던 기억을 떠올렸고 이것이야말로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다. 주무부처인 상공부를 설득해 어렵게 5만 달러를 빌려 일본 명성식품에서 기계 2대와 기술을 도입하고 마침내 63년 9월 15일 삼양라면을 탄생시켰다.
초기 삼양라면은 주황색 포장지에 중량은 100g, 가격은 10원에 출시됐다. 그러나 전 회장이 기대한 것과 달리 삼양라면에 대한 소비자 반응은 냉담했다. 오랜 기간 곡식 위주 생활을 하던 우리나라 사람은 들어보지도 못한 라면이 나 오자 라면의 "면"을 섬유나 실 명칭으로 오인해 구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드벌룬을 띄우는 등 아무리 홍보를 해도 판매가 되지 않자 삼양식품은 무료 시식회를 역, 극장 앞, 공원 등에서 열었다. 처음에는 생소해 꺼리던 사람들도 라면이라는 새로운 맛의 매력에 빠지게 됐고 그 소문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다.
65년 식량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범국민운동으로 실시된 "혼분식 장려 정책"은 저렴한 비용으로 영양 면에서 부족함 없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라면시장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했고 69년에는 월남에 라면을 수출하고 이어 미국 러시아 유럽을 비롯해 동남아 중동 중남미 등 세계 60여 개국에 수 출길을 열었다.
"당시 삼양식품은 부러울 것이 없는 기업이었죠. 88년 라면 점유율이 60%를 넘었고 매출은 5,000억 원에 달했습니다."
이처럼 자신감이 넘쳤던 그가 89년 우지파동이라는 암초를 만났다.
89년 11월 3일 검찰은 라면 원료로 사용하는 쇠기름을 공업용 우지에서 추출했다고 발표했다. 식용으로 명백히 기록돼 있는 우지를 검찰이 잘못 발표했다는 것이 삼양식품 측 주장이다. 사건 발생 13일 만인 11월 16일 당시 보사부 장관이 나서 라면 무해판정을 내리면서 불을 껐지만 삼양라면은 이미 부도덕 기업으로 낙인찍혔고 이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우지파동으로 직원 1,000여 명이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것이 무엇보다 슬펐습니다. 서울 도봉동 공장은 3개월 동안 문을 닫았고 100억 원 상당 제품을 수거 하는 등 수천억 원대 손해(3,000억 원 추정)를 가져왔죠. 이로 인해 60%에 달했던 시장점유율은 10%대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는 삼양식품 우지파동을 부패정권에 의한 희생양이라고 단정했다.
전 회장은 "일본에서도 현재 우지 돈지 팜유 비율을 3대3대3 비율로 사용하고 있는데 굳이 한국에서만 우지사용을 문제 삼았는지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재판 때 서울지방법원에서 5년여 동안 재판부를 다섯 번이나 교체하면서 판결을 늦춘 것도 정치권 논리로 해석했다.
그는 또 정치권에서 노골적으로 정치자금을 요구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여권 정치인이 청와대에 찾아가자고 제안하더군요. 당시 기업인이 청와대에 들어가려면 50억 원 정도를 챙겨가야 한다고 하면서요."
전 회장은 이 같은 유혹을 뿌리쳤다고 설명했다.
"기업은 세금 꼬박꼬박 내고 고용 늘리면서 소비자에게 신뢰를 지키면 됩니다. 나는 이런 신조를 지켜왔기 때문에 불의에 굴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는 우지파동을 이처럼 뚝심과 독서로 극복해 나갔다.
"인내심을 기르는 데는 역사책이 최고죠. 우지파동을 겪으면서 4,000권을 읽었습니다. 9,000여 권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중 절반은 이때 읽은 거지요."
하지만, 전 회장도 97년 외환위기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기업 이미지는 실추됐고 수천억 원대 피해를 봐 사면초가 위기에 몰렸는데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시장 반응은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외환위기 충격으로 환율은 급등했고 30~40%에 이르는 초고금리 시대가 되면서 회사는 부채 상환 압박 등 자금난을 겪으면서 부도로 이어졌다.
98년 2 월 회사는 급기야 화의를 신청해야 했고 그해 9월에는 서울지방법원에서 화의 인가 결정을 받았다.
"화의기업은 원리금 상환이 어려워지면 외국자본에 매각되거나 지분양도가 돼 경영권을 상실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죠. 자산 가치가 6,000억~7,000억 원에 이르는 삼양식품도 500억 원에 팔릴 뻔했지요."
전 회장은 외환위기 때 삼양식품이 시련을 겪은 것은 정부가 방치해서 일어난 관재라고 회고했다.
"정부는 세수부족을 구실로 수입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원칙은 무시하고 수입이 없는 데도 있다고 가정하고 인정과세를 강행해 삼양식품은 화의기간에도 두 차례에 걸쳐 세금 130억 원을 내야 했다"고 밝혔다.
전 회장은 라면과 관련이 없는 자회사를 팔아치우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강원레저 파크밸리 골프장, 삼양유지사료, 서울 종로 본사 사옥 용지, 부산공장 용지 등을 팔았다. 그리고 지난 3월 23일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화의채무 보고의무면제"를 받아냈다.
전 회장은 삼양식품 화의 졸업과 관련해 같은 이북출신으로 평소 친분이 있던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 우호주 매집에 도움을 준 것과 채무조정으로 이자를 대폭 인하해 주고 채무 400억 원을 출자전환해 주면서 출자전환된 주식에 대해서도 삼양식품 대주주에게 우선매수청구권을 부여한 신한은행을 가장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 회장은 지난 3월 23일 대관령 목장에서 제44차 주주총회를 열고 삼양식품 4차 창업을 선언했다.
그는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기보다는 현 사업기반을 재정비해 4~5년 뒤 무차입경영을 실현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미 경영에 참여했던 두 아들도 현장부터 경험을 다시 쌓으라면서 공장으로 보냈다.
라면 종가 부활을 선언한 전 회장이 아호 "이건(以建)"처럼 뜻한 바를 기필코 이룩할 수 있을지 업계 시선이 쏠려 있다.
※ 출처 - 매일경제
▣ 삼양라면의 지난 역사
60년대 중반…
세상에 한국보다 더 배고픈 나라는 없었다. 오죽하면 그 당시에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살았었으니까.
한국의 기아문제는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이제는 개인의 자급이나 구호는 물론, 국가 정책으로도 서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보다 못한 삼양식품 전중윤 회장은 결국 기업차원에서 한국민의 배고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의 묘조라면 사장을 회장이 직접 찾아가 궁핍한 한국의 식생활을 호소하며 기술이전을 부탁했다. 물론 거절당했고… 회장의 수개월에 걸친 호소에 결국 감동한 묘조라면 사장은 노하우 전부를 이전해주었다.
삼양식품은 묘조라면의 기술을 이전받아 삼양라면이라는 라면회사를 설립한 후 당시 한국인들에게 가장 부족했던 단백질 보충을 위해 소고기를 원료로 한 수프로 국물을 만들고… 꼬들꼬들한 면을 만들기 위해… 일본에서 쓰던 식물성 저가 팜유가 아닌… 값 비싼 소 우지로 면을 튀겼다.
당시 식물성 팜유를 쓰던 일본조차 원가 상승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던 이 우지는… 미국 패스트푸드점이나 식당에서 사용하던 고급 기름이다. 물론 가정용이나 고급식당에서 팔리던 1등급 우지보다는 낮은 등급이었지만…그건 소고기의 등급에 따른 문제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게 그 유명한 삼양라면… 대한민국 최초의 라면이었다. 이 라면은 허기진 서민들과… 배고픈 어린이들… 그리고 끼니 챙기기 힘든 노동자들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었고… 심지어 해외에 수출되어 외국의 배고픔 문제와 국가경제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박정희 대통령조차 삼양식품의 인간존중 경영책을 보고 배웠다는 일화는 참 유명하다. 박정희가 유일하게 믿고 세무조사를 하지 않았던 기업은… 유한양행과 삼양라면뿐이었다.
지금도 그런 인간중심의 인사정책은 아직까지 적용되고 있다. 국민 영양을 위해 고가 원료인 소고기 재료만 고수하고… 서민들 주머니 사정 때문에 너무나 저가에 팔았기 때문에 삼양라면은 5년간 적자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절대 가격을 올리지 않았고 당시 라면 한 그릇은 10원 이였던 점….
삼양의 재정이 5년 후 흑자로 돌아서고 시장이 커지자 조선일보, 동방유량, 롯데(농심), 럭키(엘지)가 라면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가격과 품질 면에서 게임이 되지 않았다. 삼양과 동등한 원료로 같은 가격의 라면을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그러면서도 흑자를 보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삼양은 이윤이 아닌 서민의 배고픔 해결을 1 순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삼양식품의 저가 가격에 다들 가격도 못 올려보고 적자로 허덕이다 망한 이유가 그것이며… 식물성 저가 팜유를 써서 근근이 연명하던 타 라면 사들의 면발은 맛도 없고 꼬들꼬들한 느낌도 없었다.
삼양라면은 그렇게 이 나라의 대표 인스턴트 식품으로 자리 잡았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80년대 말….
라면에도 다양성과 고급화를 바라는 소리가 나오고… 빙그레, 야쿠르트, 오뚜기까지 라면 사업에 뒤늦게 합류했고 심지어 전두환 마누라인 이순자까지도 청보식품이라는 라면 회사를 만들었다.
시장이 다양해지고 배고픔마저 잊은 국민들은 이제 서서히 순하고 담백한 맛의 삼양라면의 맛에 싫증 내기 시작했고 매운맛 짠맛 단맛만 자극적으로 강조한 라면에 혀가 마비되기 시작했다. 라면 시장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결국, 삼양라면은 시장 점유율 40퍼센트까지 내려앉았다.
하지만, 시련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삼양라면이 20년간 써온 2등급 소 우지가 노태우 정권 시절 공업용 우지로 보건사회부에 의해 검찰에 고발된 것이었다. 문제의 공업용 우지는 미국 고급 식당이나 가정… 패스트푸드점에서 사용하는 2등급 고가 우지였지만…
모든 언론사들은 이것을 마치 폐기물로 쓰는 쓰레기 오일로 보도하였고… 결국, 라면시장 대부분을 차지하던 삼양라면은 이 사건 직후 5퍼센트까지 매출이 감소했고… 80년대 당시 4,000여억 원의 손실을 입게 되었다. 게다가 직원 80퍼센트가 실직… 160만 박스의 라면을 폐기처분하였다. 결국, 라면시장은 롯데에 전부 내주고… 마가린과 쇼트닝 회사마저 롯데에 내주게 된다.
그로부터 5년 후…식용우지 고급기름이고… 미국 가정에서도 쓰이기 때문에 무해하다는 법원판결이 났지만… 삼양라면은 이미 피범벅으로 식물인간이 된 상황이었고… 그 기사조차 부패 언론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우지파동 때는 앞다투어 1면에 선정성 기사를 내걸고… 무혐의가 드러나자 꼭 보도할 의무는 없다며 외면한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삼양라면 하면 떠오르는 게 공업용 우지다.
언론이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얼마 전 조선일보에 광고 철회기사를 한 삼양라면에서 아주 우연의 일치로 너트가 나왔다. 조선일보는 몇 날 며칠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고 있지만… 정작 비슷한 시기에 농심라면에서 나온 바퀴벌레는 기사로도 내지 않고 있다.
삼양라면에 너트가 우연히 들어갔을 거라 믿는다. 하필이면 지금 딱 우연히 말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삼양라면에서 너트가 아니라 공업용 자동차 엔진이 나와도 삼양라면을 먹을 것이다.
나는 자장면과 떡볶이를 먹지 않는다. MSG 화학조미료를 퍼 넣기 때문이다. 농심에서 나온 라면도 먹지 않는다. 타사 라면보다 MSG를 두 배 가량 높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삼양라면만 전 라면에 걸쳐 MSG를 넣지 않는다.
MSG 넣으면… 이런 자극적 입맛으로 버려진 라면시장에서… 삼양라면도 금방 농심을 따라잡고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것이다. 하지만, 삼양라면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67년 당시 창업주 전중윤 회장이 남대문을 걷다가 꿀꿀이 죽이라도 얻어먹으려고 기다리던 가난한 어린이들을 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린 후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그 잘 나가던 동방생명 부사장 직을 사퇴하고 일본에 구걸하여 기술을 이전받아 만든 대한민국의 유일한 양심적 먹거리 기업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서 번 돈을 죄다 일본으로 가져가는 그리고 정경유착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그딴 양심불량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 나의 프랑스 유학시절 삼양라면과의 숨겨진 일화
벌써 20년도 넘은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어느 대학도시의 기숙사에 우리나라 학생들이 한 십여 명 있었습니다. 낯선 이국 생활이라 당연히 고국의 음식이 그리웠지요. 당시만 해도 한국 음식점이 주변에 없었고 어쩌다 명절 때나 부모님들께서 비싼 돈 들여 보내주시는 밑반찬이라야 받아보기 무섭게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곤 했습니다. 라면이라도 마음껏 먹어보는 것이 모두의 소원이었지요.
프랑스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식품점에서 라면을 팔기는 했는데 홍콩인지 싱가포르에서 만들어서 "출전일정" 일본상표를 붙인 조잡한 제품이었고, 첨부된 중국식 돼지고기 맛 수프가루를 타서 요리하면 정말 웬만큼 비위가 좋지 못한 사람들은 그 느끼함에 다 토해버릴 정도. 그래서 저희는 수프가루 넣는 대신 소금, 양파, 고춧가루로 맛을 내고는 했지요. 우리나라 우리맛 라면을 너무나 먹고 싶은 마음에 하루는 꾀를 내었습니다.
기숙사 외국 학생들이 모두 삼백여 명쯤 되었는데 학교 식당에서 모두에게 대한민국 라면파티를 멋지게 열어주자고, 그래서 우리나라 우리 맛 라면의 진수를 전 세계에 보여주자고.
그런 내용을 써서,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삼양라면 사장님께, 다만 본사가 당시 서울 종로 청진동에 있었다는 것만 알고서 도와주십사 라는 편지를 진담 반 장난 반 올렸습니다. 물론 무모하고 황당한 요청임을 잘 알기에 저희는 삼양라면에 대해 답신조차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
파리 오를리 공항 세관에서 제게 소환장이 날아왔습니다. 외국산 식료품이 무려 2 큐빅 톤이나 제 앞으로 왔는데, 도대체 학생의 신분이라면서 혹시 밀수꾼이냐 아니냐 라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날 밤차를 타고 파리에 상경, 새벽에 오를리 공항에 가서 여차여차 사정을 말하고 물건을 찾아왔습니다. 세관원들은 거의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짓더군요. 말이 2 큐빅 톤이지 작은 봉고차에 가득 차는 엄청난 물량이, 당시 돈으로도 수백만 원 넘는 특급 항공운임표를 붙인 채 제 앞에 쌓인 모습, 라면 상자의 산더미는 제 생전 처음 보는 장관이었지요. 마치 오르기 어려운 높은 산을 정복했노라는 성취의 뿌듯함에 앞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보잘것없는 일개 학생의 편지 글만을 믿고, 라면 백여 상자를,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운임까지 지불하여 특급우편으로 보내주신 삼양라면 사장님의 마음 쓰심을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고 말더군요….
과연 어떤 분이실까. 뵙고 싶었습니다. 감사하고 황송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존경한다고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저희의 대한민국 라면파티는 대성황으로 끝났고요. 외국학생들에게는 "짜짜로니"였던가요, 자장면 류가 대인기를 끌었지요. 작은 대학도시였지만, 라면파티 한 번으로 "한류열풍"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0년도 더 지나고….
국민기업 삼양라면이 처했던 어려움도 그저 남의 일인 양 지나쳐버리고, 이런 저런 핑계로 삼양라면 사장님께 그 흔한 그림엽서 한 장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오늘 우리나라의 위기를 맞았지만, 삼양라면 사장님의 신념과 배려의 마음을 떠올리며 저희의 희망으로 삼습니다.
삼양라면! 사랑합니다. 영원히 사랑합니다.
※ 출처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1233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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