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숫집 훈훈한 사연.... 국수보다 따뜻해요"
(옛집의 국수 한 그릇)
맛집의 조건은? 맛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말씀, 주머니사정 고려해서 너무 비싸지도 않아야 하고, 일하는 사람의 서비스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집이라면 맛집으로 등극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 집에 대해 이야깃거리가 많으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절로 소문을 타게 되니까요. 맛집 탐방을 자주 하는 맛객 입장에서도 음식은 괜찮은데, 이상하게 그 집에 대해 이야기 할 게 별로 없는 집은 소개하기가 참 난감합니다.
반대로 음식을 먹고 식당을 나서는 순간 그 집에 대한 글 한편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런 집이 바로 이야깃거리가 많은 집입니다. 그렇다면 맛집의 이야깃거리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인심 좋은 집, 그 집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색다른 음식, 독특한 경영 마인드를 가진 사장님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맛객이 가장 선호하는 이야깃거리는 휴머니즘. 즉, 인간의 온정이 물씬 풍기는 집입니다.
음식 한 그릇에서 느껴지는 요리사나 주인장의 인간미는 맛있는 음식을 넘어선 감동적인 맛이 되기도 합니다.
며칠 전 이촌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다 삼각지에서 내렸습니다. 이촌에 있는 일본음식전문점을 탐방하고 돌아가던 길입니다. 삼각지에서 내린 건 이촌의 음식점에서 느낀 실망감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맛집도 찾을 겸 해서입니다.
국방부 방면(4호선 삼각지역 1번출구)으로 나오면 우리은행이 있고 은행을 돌아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대구탕으로 유명한 원대구탕과 자원대구탕이 있습니다. 평일에도 손님들로 가득 찬 곳이지만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문 밖에는 열 댓 명의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나쳐 갑니다.
골목 끝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니 또 7~8명의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게 보입니다. 차돌박이로 소문난 봉산집입니다. 아직 가보진 않아 어떤 맛인 줄은 모르지만 듣자하니 가격이 꽤 비싼 집입니다. 맛 평가에 있어서도 호불호가 확실한 집입니다. 차돌박이보다 이 집의 된장찌개가 생각나서 들른다는 손님이 있는 반면에, 차돌박이 기름이 들어가서 기름이 둥둥 뜬 이것도 음식이냐 찌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 걷습니다. 오른쪽 골목으로 30여년 전통이라는 순대국집이 보입니다. 오늘은 순대국이 당지기 않습니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조금 더 걷다보니 허름한 외관을 한 식당 두 곳이 눈에 띕니다. 삼각지는 국방부가 자리 잡고 있어 개발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선지 도심답지 않게 허름한 건물들이 꽤 많습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합니다.
두 집다 국수와 김밥이 주 메뉴인 듯합니다. 그 중에 한 집, 느낌이 옵니다. 마치 여러 번 들락날락 한 것처럼 낯설지가 않습니다. 간판에는 옛집이라는 상호와 함께 국수김밥이 적어져 있습니다.
“흐음~ 이런 데가 있었어?”
옛집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테이블 서 너 개뿐으로 작은 규모입니다. 메뉴판을 봅니다. 떡만두국 4천원, 수제비와 칼국수 3천5백원, 비빔국수 3천원, 온국수 2천5백원, 김밥 1천5백원입니다. 이 밖에도 여름음식으로 콩국수 5천원과 아침 6시부터 9시까지만 파는 우거지된장국 2천5백원이 있습니다.
재래된장에 직접 말린 우거지를 넣고 푸욱 끓여 낸다고 합니다. 아무리 많이 팔아도 밑지는 음식이지만 새벽 인력시장에서 허탕 친 사람들이나 바쁜 출근길에 아침 한술 못 뜬 직장인들을 위해 만든 음식입니다. 할머니의 마음 씀씀이가 우거지 된장국만큼이나 구수하단 생각입니다.
“뭐 드릴까요?”
“국수 주세요”
국수를 주문하고 나서 가게를 둘러보니 뭐, 무슨 사정으로 온국수 가격을 5백원 인상한다는 안내문이 보입니다. 10여년 가까이 2천원에 묶어두었다고 합니다.
“텔레비 볼려면 이쪽으로 앉아요”
할머니가 국수와 배추김치를 내려놓으면서 말씀하십니다. 텔레비전을 등지고 앉아있어서 그럽니다. “아뇨 안 봐도 되요” 대답하고 국수를 살폈더니 넉넉한 양입니다.
내용물은 면과 유부, 파, 다시마가 전부입니다. 후루룩 국물부터 마셔봅니다. 담백하면서 개운합니다. 소박한 겉모습과 달리 국물은 화학조미료의 속임수가 아닌 재료의 깊은 맛이 느껴집니다.
김치에는 배추 말고 다른 재료가 거의 없습니다. 국수에 먹는 김치는 이렇듯 깔끔해야 합니다. 적당하게 숙성된 상태도 식감을 살려줍니다. 면 위에 김치를 착 올려서 먹는 게 따로 따로 먹는 것 보다 맛있습니다. 그렇게 먹어도 김치 양념에 의해서 국수 국물이 별다른 영양을 받지 않습니다.
“국물은 뭘로 뽑았어요?”
“멸치요. 대파 뿌리도 넣고 다시마랑 푹 끓여요”
그 국물에 소금으로만 간해서 국수를 만다고 합니다. 주방에서 일 하시는 할머니가 친절하게도 알려줍니다. 가끔 텔레비전에 소개 된 음식점들 맛의 비법을 물으면 절대 알려줄 수 없다고 손 사레를 칩니다.
자신의 음식에 대해 그리 자신이 없을까요? 비법 알려줘도 손맛이란 백이면 백 다 달라 같은 맛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아니면 남들이 따라 하는 게 겁이라도 나는 걸까요?
할머니는 육수를 뽑기 위해 새벽 4시부터 반나절 가까이 연탄불로 우려낸다고 합니다. 참 좋은 기분으로 식당 문을 나섭니다. 맛도 맛이지만 이 집에 대한 글 한편이 이미 완성되어 머릿속에 저장되었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그대 삶이 지치고 힘들다면, 만날 수 없는 어머니가 그립거든 삼각지에 있는 옛집이란 국수집을 찾아가 보시라. 넉넉한 국수 양만큼이나 편안하고 친절하게 그대를 반길 것이다.
과장된 웃음과 립 서비스 차원의 친절이 아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친절, 아니 요즘 세속적인 친절과는 다른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과도 같은 친절이다. 그래서 그 집은 따뜻한 국수 국물만큼이나 온정이 넘치는 집이다.
넉넉한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그래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다면 눈치 보지 말고 국수 한가락 더 청해보시라. 퇴색되어버린 밥상머리 인심이 아직 살아있으니까. 그 집에 앉아 국수 한 그릇을 먹으면서 어머니같은 할머니같은 분께 아무 말이나 걸어 보시라. 허기진 배는 물론이거니와 허기진 마음까지 채워 질 것이다. 국수집을 나서면 어느새 삶의 위안을 받은 자신을 발견하리라.
맛객이 옛집을 나서면서 글의 방향이 잡혔던 건 이 집에서 어떤 이야깃거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온정이 있는 집이란 이야깃거리, 맛객이 좋아하는 소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소개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아직 소개하지 않은 집들이 밀려있기도 하지만 묵히면서 글의 방향을 다듬기도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무슨 생각 때문이었는지 국수집을 다녀오자마자 인터넷으로 옛집을 검색해봤습니다.
바로 글 쓰지도 않을 거면서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따뜻한 집은 소문이 안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야 소개하는 입장에선 기쁨이 배가 되거든요. (참 이기적이죠?) 그런 바람과 달리 옛집에 관한 글들이 검색됩니다. 그런데 여느 맛집 소개 글과는 좀 다릅니다.
‘옛집 이라는 국수집’ 의 타이틀을 가진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글의 내용도 음식에 관한 게 아니고 이 집과 연관 된 일화 한토막입니다. 검색을 이리저리 하다 보니 이 집의 사연을 최초로 퍼뜨린 사람은 김형민SBS프로덕션 PD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분의 글 중, 요약한 내용이 '옛집이라는 국수집' 입니다. 아래에 김형민 PD의 글 전문을 허락 하에 게재합니다.
옛집이라는 국숫집
삼각지 근처의 국수집 하나를 촬영했을 때의 일입니다. 멸치국물로 진하게 우려낸 국수와 속이 알차 뵈는 김밥 정도가 메뉴의 전부이지만 한 끼를 거뜬히 채우기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진짜 우리 할머니같은 주인의 마음씨가 더해지면 아무리 양 많은 이도 그득해진 배와 벌어진 입을 추스르며 가게 문을 나서게 되는 집이었습니다.
방송 다음날 무심코 제 앞의 전화가 울려서 받았습니다. 한 40대 정도의 남자가 간절한 목소리로 거기 갔다 온 PD를 찾아서 당사자임을 밝혔더니 갑자기 귀가 따가워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그 할머니 때문에 인생이 뒤바뀐 사람입니다."
황당한 서두였습니다만, 그의 이야기는 꽤 길었습니다. 그는 15년쯤 전,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털어먹고 설상가상으로 아내까지 그의 곁을 떠나 버리는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노숙자가 되어 용산역 앞을 배회하는 서글픈 인생이 된 거죠.
하루는 배가 너무너무 고파서 용산역 앞에 늘어선 식당들 앞에서 밥 한 술을 구걸했지만, 하지만 그는 어느 곳에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답니다. 두들겨 맞기도 했고, 어딘 가에선 개를 풀었다더군요. 박절한 세상 인심에 그는 반미치광이가 되어 갔습니다.
용산역 인근 식당을 일일이 다 들어갔지만 모든 곳에서 박대를 받고 나오며 밤에 휘발유 뿌리고 불질러 버리겠노라는 독한 맘을 먹었지요. 한 집, 한 집 X자를 쳐 가다가 작은 골목에 있는 할머니네 국수집까지 간 겁니다. 할머니는 그의 비루한 몰골을 보고도 환하게 웃으며 선선히 맞아 주었습니다.
허겁지겁 국수를 배로 퍼 넣고 있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그릇을 뺐었다네요. 그러더니 할머니는 삶은 국수와 국물을 한가득 다시 따라 주더랍니다. 거의 두 그릇 양은 됨직한 국수를 다 털어 넣은 뒤에야 할머니께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이 떠올랐습니다. 원래는 당연히 ‘배를 쨀' 생각이었지만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더랍니다.
할머니가 다른 국수를 삶는 틈을 타서, 그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자신의 뒷꼭지에 대고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국수 먹고 힘난 다리를 기운차게 놀리며 도망을 쳤지요. 그렇게 한참을 달음박질치다가 잠시 가쁜 숨을 뱉어내는데 그의 귓전에 걸려 있던 할머니의 외침이 불쑥 머릿속에 들어왔답니다.
"그냥 가!! 뛰지 말어!! 다쳐요."
"어디 가? 거기 서! 돈 내놔!"쯤으로 흘려들었는데 그 엉겁결을 지나고 보니 그건 할머니의 안타까운 걱정이었다는 겁니다. 즉 할머니는 자신이 돈을 내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도 친절하게 맞아 주었고, 국수 한 그릇 더 퍼 주면서 웃어 주었고 배은망덕하게도 말 한 마디 없이 도망갈 때에도 뛰지 말라고 외쳐 준 것이죠.
그날 그 아저씨는 용산역 앞으로 돌아가서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답니다. 자신을 속이기만 해 왔던 세상, 그리고 자신을 버렸던 사람들이 쳐 둔 얼음장 속에 숨 막혀 가던 자신에게 그 할머니의 말 한 마디는 그야말로 따스한 불씨 한 조각이었다는 겁니다. 그는 얼마 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파라과이로 홀홀 단신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5년 후 그는 꽤 큰 장사를 벌이는 성공시대를 이룩해 냈다고 합니다.
기나긴 전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제가 든 생각은, 사람의 말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내뱉는 수백 수천 마디의 말들의 의미를 까먹고 살아갑니다.
아마 국수집 할머니조차 도망가던 아저씨의 뒤에 대고 뭐라 외치던 날의 기억을 잃어버렸을지 모르고, 그날 그 아저씨에게 험악한 욕지거리를 던졌던 식당 주인장들의 머릿속에도 그 아저씨는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은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지요.
산다는 것, 나 혼자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임을, 그리고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나, 변두리 식당 주인, 그리고 그냥 대한민국의 장삼이사들도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고리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게 해 주는 그 날의 통화였습니다. 김형민·SBS프로덕션 PD
옛집:02) 794-8364
위치: 4호선 삼각지역 2번 출구로 나와 좌측 골목으로 들어가면 바로 보임.
2007.2.15 맛객(블로그= 맛있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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